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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칼럼] 대지의 서사와 시간의 미학, 허베이 기채(冀菜)가 일궈낸 미식의 지평
[대한기자신문 김지윤 한중칼럼니스트] 중국의 심장부이자 수도 베이징을 품고 거대한 발해만을 마주한 땅, 허베이(河北)는 단순히 지리적 요충지를 넘어 수천 년 중국 역사의 맛이 겹겹이 쌓인 ‘미식의 지층’과도 같다. 이곳의 음식 문화인 기채(冀菜)는 화려한 황실의 품격과 강인한 민초의 생명력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본 칼럼에서는 허베이 음식만이 가진 독특한 히스토리와 그 속에 담긴 브랜딩의 정수를 세 가지 핵심 요리를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허베이 음식의 뿌리와 미학,‘함선(咸鲜)’의 철학 허베이 요리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함선(咸鲜, 짭짤하고 신선함)’이다. 이는 자극적인 화려함에 기대지 않고, 소금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재료를 통해 식재료 본연의 맛을 극대화하는 정직한 미학이다. 허베이는 지형적으로 산해관의 해산물, 타이항산맥의 산채, 화베이 평원의 가축 등 풍부한 식재료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명·청 시대를 거치며 베이징으로 향하는 전국의 물자와 인재가 모여들면서, 허베이 요리는 민간의 소박한 조리법에 황실의 정교한 기법이 더해지는 독특한 진화 과정을 겪었다. 예술가가 흙이라는 본질에 불의 기운을 더해 도자기를 빚듯, 허베이의 요리사들은 식재료의 본질에 '화후(火候, 불 조절)'의 기술을 더해 역사를 써 내려왔다. 허베이 미식의 세 가지 기둥, 대표 요리 분석 ◆ 나귀고기 훠사오(驴肉火烧), 전쟁의 허기를 채운 민초의 전략적 서사 허베이 미식의 상징인 ‘뤼러우훠사오(驴肉火烧)’는 단순한 길거리 음식을 넘어선다. 이 음식의 뿌리는 명나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연왕(燕王) 주체(훗날 영락제)가 군사를 일으켰을 때 군량이 부족해지자 군마를 잡아 허기를 달랬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민간에서는 말 대신 나귀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청나라 건륭제가 그 맛을 극찬하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 진마오스쯔위(金毛狮子鱼), 칼끝으로 빚은 예술적 기교와 시각적 상징 허베이 요리의 기술적 정수는 스좌장(石家庄)에서 탄생한 ‘진마오스쯔위(金毛狮子鱼)’에서 완성된다. 1950년대 명장 원롄청(袁连成)에 의해 창제된 이 요리는 쏘가리 한 마리를 수만 가닥의 미세한 실처럼 칼질하여 튀겨낸 예술 작품이다. 접시 위에 새콤달콤한 소스를 부으면 황금빛 갈기를 휘날리는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형상이 연출된다. ◆ 직례관부채 총독두부(总督豆腐), 황실의 권위와 지방의 풍요가 만난 하이엔드 서사 청나라 시대, 수도 베이징을 수호하던 직례총독서(直隶总督署)가 위치한 바오딩은 관부(官府) 요리의 살아있는 화석이다. 특히 ‘총독두부’는 청나라 명신 이홍장(李鸿章)이 즐겨 먹었다는 서사를 품고 있다. 평범한 두부에 새우, 조개 등 해산물과 고기 육수의 진한 맛을 배게 한 이 요리는 겉은 소박하나 속은 화려한 ‘내유외강’의 미학을 실천한다. 흙과 불, 그리고 맛이 빚어낸 허베이의 미래 허베이의 음식 문화는 [독보적 기법] + [시각적 상징] + [끊임없는 서사 발신]을 이미 수백 년간 식탁 위에서 실천해 왔다. 허베이의 맛을 탐닉한다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대지가 품어온 시간의 결을 만지고, 그 안에 흐르는 장인 정신의 맥박을 느끼는 일이다. 예술가들이 이 땅의 흙을 빚어 도자기를 만들듯, 허베이의 미식 역시 그 땅의 정신을 '맛'이라는 언어로 번역해내고 있다. 이러한 로컬의 정체성이야말로 세계무대에서 빛날 가장 강력한 음식브랜드의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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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이 겨울을 데피는 한 편의 시, 남현설의 '해시'
해시(海視) 남현설/ 시인, 권대근문학상운영위원회 사무국장 숨은 부서져 모래 위로 흐르고 파도는 심장을 삼킨 체 바람 속으로 흩어진다 어깨 위 철로 된 새들이 하늘을 가르고 시선은 풍경의 일부가 되어 바람과 물 사이에 머문다 해녀의 숨은 심해 깊이 갇히고 기름 그림자 심장을 덮는다 폐비닐은 기억을 감싸고 기계의 팔이 위장을 흔든다 이제 울음조차 사치다 그럼에도 파도 위에 그림자를 새기며 부서진 숨결 속 사라져가는 이름들을 찾아 길을 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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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단독] 일리야 케르니츠키, 순간을 소유하는 회화의 미학
[대한기자신문 김지윤 하북미술대학 교수 번역] “순간은 나의 것, 순간은 나의 것이다.” 러시아 시인 예브게니 바라틴스키(E. Baratynsky)의 이 문장은 화가, 일리야 케르니츠키(Ilya Kernitsky)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다. 그의 회화는 한순간의 빛과 공기, 감각의 떨림을 붙잡아두려는 시각적 기록이자, 자연과의 밀도 높은 대화다. 플레네리즘(plein-air painting)은 프랑스에서 태동한 야외 회화 전통으로, 낭만주의 미술이 고전적 형식과 고요한 선, 고정된 구도를 해체하려는 시도 속에서 발전했다. 폭풍과 움직임, 빛과 공기는 이때부터 독립적인 회화의 주제가 되었고, 줄거리나 기법, 분위기, 심지어 캔버스의 크기까지 규정하는 미학적 기준이 되었다. 러시아 인상주의 역시 이러한 프랑스 미술의 흐름과 긴밀히 호흡하며 발전했다. 2001년 열린 전시 《유럽 인상주의 ― 프랑스를 넘어》는 인상주의가 특정 국가의 양식이 아니라, 각국의 자연과 문화에 따라 변주되는 보편적 미학임을 보여준 계기였다. 러시아 인상주의는 프랑스의 날카로운 대비와 분산된 조명 위에 북방 특유의 빛과 기후, 차가운 그림자와 절제된 색채를 더하며 ‘회화적 러시아성’을 형성해왔다. 일리야 케르니츠키는 이러한 전통의 연장선에 서 있다. 그는 “자연은 최고의 스승”이라고 말한다. 야외에서 작업할수록 시각은 더욱 예민해지고, 색과 색조의 미세한 차이를 구분하게 된다는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말했듯, “인식의 문이 열리면 사물은 있는 그대로 인간 앞에 드러난다.” 플레네리 회화는 바로 이러한 인식의 훈련이다. 눈부시게 반사되는 장면을 빠르고 정확하게 포착하고, 삶의 변덕스러운 순간성을 화폭에 옮기는 능력이 요구된다. 러시아 연해주 이브시노에서 그는 바위와 호수, 숲을 통해 낭만적 정서를 담아낸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밝은 하늘 아래 펼쳐진 부채꼴 야자수가, 중국에서는 좁은 골목을 걷는 체험 자체가 회화의 출발점이 된다. 그는 색을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고 귀로 듣고 냄새로 인식한다. 타인에게는 회색이나 파란색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에게는 빛과 어둠이 무수한 색조로 분해되어 끝없이 변주된다. 그의 플레네리 작품들은 삶의 잊을 수 없는 기쁨을 간직하고 있다. 색채의 얼룩은 살아 있는 물질처럼 떨리며, 캔버스의 질감은 회화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바다는 숨 쉬고 흔들리며, 경계를 넘어서려는 존재로 등장한다. 투명한 파도와 태양빛의 반사를 물질적인 색채로 표현하려는 시도는 자연이 던지는 가장 어려운 질문이자, 예술가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과제다. 케르니츠키의 붓질은 넓고 목가적이면서도 내부에 긴장감을 품고 있다. 때로는 소나타처럼 고조되며, 칸딘스키가 말한 ‘색의 음악성’을 떠올리게 한다. 사려 깊은 붓의 움직임은 바다의 감정적 호흡을 전달하며, 자연이 지닌 복합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설령 작업실에서 완성된 작품일지라도, 그의 회화에는 여전히 플레네리 효과가 살아 있다. 이는 순간의 기적을 믿는 예술, 영원한 젊음을 지닌 회화의 방식이다. 세계의 베일이 잠시 걷히는 찰나,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신비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그는 믿는다. 일리야 케르니츠키의 회화는 그렇게 ‘순간’을 붙잡는다. 그리고 그 순간은, 분명 그의 것이 된다. [러시아원문] Визуальные новеллы Ильи Керницкого. «Мгновенье мне принадлежит, как я принадлежу мгновенью». Е.Баратынский. En plein art- c французского – пленэр, живопись на открытом воздухе. Что стоит за этим красивым словом? На художественном Олимпе именно во Франции появились романтики, главной задачей которых было избавиться от надоевшей античности. Хотелось бури, движения – только не покоя, никаких ровных линий, застывших форм, традиционных делений на планы. Именно тогда пленеризм становится основой эстетики художника, в которой свет и воздух приобретают самостоятельное значение и чисто живописный интерес, он определяет выбор сюжета, технику, настроение и даже размер холста. Школа импрессионизма в России сложилась, вдохновляемая желанием догнать французских коллег. Открывшаяся в 2001 году выставка «Импрессионизм в Европе. Не только Франция» стала свидетельством утверждения и распространения взгляда не мировой импрессионизм, как на систему его национальных вариантов. Русский импрессионизм не исключение. Он демонстрирует родство с мировыми разновидностями, сохраняя живописную и интонационную «русскость». Художники адаптировали французский стиль, добавив национальный колорит: особенность северного света и климата, отличающийся от французского резкими контрастами, рассеянным освещением, холодными тенями.. Натура, считает художник Илья Керницкий, - «лучший учитель. Очищается взгляд, больше начинаешь различать цветов и оттенков». «Если бы были прочищены врата восприятия, все бы предстало перед человеком в том виде, как оно есть, -бесконечным»,- писал У. Блейк. Действительно, работа на пленэре требует умения обобщать и в то же время быть внимательным к характерным деталям, подмечать блики и видеть рефлексы, передавать впечатления от сюжета точно и быстро, находить те изобразительно-выразительные приемы, позволяющие отобразить «трепет» жизни в ее изменчивости. Где бы Илья ни работал- в России: Ившино, Приморском крае - изображения скал, озер, леса- передают романтическое настроение художника, в Малайзии с ее веерными пальмами на выцветшем небе или Китае, где мы вместе бродим по узким улочкам, художник не просто видит цвета -он ощущает их кожей, слышит ушами, вдыхает, как запах, чувствует на языке. И то, что для всех остальных остается «серым» или «голубым», для него дробится на множество оттенков, сплетается в бесконечное количество тонов света, тьмы и перехода от одного к другому. Природа всюду искушает человека. Особым искушением стала для Ильи Керницкого Куршская коса, где он работает много и подолгу. Пленерные картины живописца сохраняют незабываемые радости жизни, пятна цвета мерцают, как живая материя, определяя ценность фактуры полотна. Знакомясь с произведениями, можно бесконечно их рассматривать и давать определения цветам и их сочетаниям: вот черно-синий, немного темной охры, вкрапления малахитовой зелени, салатовый, почти эмеральдовый – всплывает старое слово- самая малость кобальта, и очень много огня – красно-черного, жгучего как перец. А совсем рядом, через авандюну, поросшую песколюбами,- море. Оно дышит и колышет, хочет выплеснуться за края рамы. Как вполне материальными красками можно нарисовать эту волнующуюся стихию?! Как изображенная волна может быть прозрачной и светиться от солнца? Натура привлекает его нераскрытой тайной, хочется пройти «сквозь нее», увидеть не только прелесть, но закодированную драматургию, прорваться через стабильные картины, которые преподносит лукавое зеркало, постигнуть сокровенные ритмы, линии, формы, не упустить ни одного мгновения в пляске бушующих волн. У художника широкая пастозная манера письма, что создает эффект «грубой ткани» - поверхность листа выглядит вибрирующей, живой, он в постоянных поисках тончайших оттенков цвета- серого, зеленого, желтого. В палитре иногда присутствует особая внутренняя напряженность, напоминающая то «трубный глас», то гармонию, утешительную, как соната. Как тут не вспомнить аналогии В.Кандинского: «Голубой цвет, представленный музыкально, похож на флейту, синий- на виолончель, делаясь темнее, – на чудесные звуки контрабаса, иногда его можно сравнить с низкими нотами органа». Продуманные движения кисти буквально передают эмоциональные вздохи моря, уверяющие нас, что оно» гораздо разнообразнее суши». Эта морская стихия напоминает человека, у которого под внешней простотой таится сложность характера. Даже если работа дописывается в мастерской, пленерные эффекты становятся важнейшим импрессионистическим приемом. Это искусство вечной молодости, веры в то, что здесь и сейчас может свершиться чудо, и сквозь покровы мира на мгновенье проступит его всем понятный таинственный смысл. Покладова Валентина, искусствове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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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칼럼] 불과 흙의 우연성이 빚어낼 22세기 미학... 라꾸(Raku) 소성 기법의 미래적 변용
◈ ‘순간’을 포착하는 흙의 철학 [대한기자신문 김지윤 한중칼럼니스트] 도자 예술의 역사는 통제와 비통제의 끊임없는 변주곡이었다. 그중에서도 16세기 일본에서 발현된 라꾸(樂, Raku) 소성 기법은 가마의 온도가 정점에 달했을 때 기물을 꺼내 급냉시키거나 톱밥 속에 넣어 환원시키는, 즉 '찰나의 우연'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혁신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21세기의 기술적 정교함을 넘어, 서기 2200년의 도자 문화는 역설적으로 이 ‘불완전한 아름다움’에 다시 주목하게 될 것이다. 필자는 라꾸 소성이 지닌 즉흥성과 비정형성이 미래의 첨단 소재 및 환경과 결합하여 어떻게 독자적인 미학 체계를 구축할지 고찰하고자 한다. ◈ 기술적 융합, 나노 유약과 대기 제어 소성 2200년의 라꾸는 단순히 나무통과 톱밥에 의존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대기 중의 산소 농도와 냉각 속도를 마이크로 초 단위로 계산하는 ‘정밀 비정형 소성(Precision Imprecision)’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 나노 변색 유약: 고온의 가마에서 꺼내진 도자기가 대기와 접촉하는 순간, 나노 입자들이 반응하여 홀로그램과 같은 다차원적 색상을 구현한다. 이는 과거의 금속성 광택(Luster)을 넘어선 시각적 혁명이다. * 지속 가능한 탄소 중립 소성: 미래의 라꾸는 화석 연료 대신 수소 에너지와 포집된 탄소를 활용한 환원 기법을 사용한다. 이는 예술적 성취와 지구 환경의 공존이라는 시대적 과업을 완수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 미학적 변천: 와비사비(Wabi-Sabi)의 디지털 전이 미래 도자기의 핵심 가치는 ‘완벽한 인공’에 대한 피로감에서 오는 **‘유기적 결함’**에 있다. 모든 것이 3D 프린팅으로 정교하게 복제되는 세상에서, 라꾸 기법 특유의 균열(Crack)과 그을음은 복제가 불가능한 고유의 데이터가 된다. "2200년의 도자는 단순히 형태를 빚는 것이 아니라, 불과 흙이 만나는 '사건(Event)'을 기록하는 매체가 될 것이다." 이러한 미학은 '디지털 와비사비'로 명명될 수 있다. 인위적인 디자인을 배제하고, 소재 스스로가 열충격을 견디며 만들어낸 무늬는 초고도화된 미래 사회에서 인간성을 회복하는 명상의 도구로 기능하게 된다. ◈ 사회적 기능, 공감과 치유의 매개체 미래 도예가들은 단순한 제작자를 넘어 '물성(Matters)의 연출가'로 거듭난다. 라꾸 소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강렬한 에너지의 변화는 퍼포먼스 아트로서의 성격을 띠게 될 것이며, 관객들은 기물이 붉게 달아올랐다가 검게 변하며 생명력을 얻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섭리를 체감한다. 특히, 2200년의 주거 공간은 미니멀리즘을 넘어선 ‘정신적 여백’을 지향하게 되는데, 이때 라꾸 도자기는 공간의 기운을 다스리는 핵심적인 오브제로 자리 잡을 것이다. 거친 질감과 매끄러운 유약의 대비는 촉각적 소통이 결여된 미래인들에게 본질적인 접촉의 기쁨을 제공한다. ◈ 불멸의 흙, 가변의 미학 도자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합성 물질이자, 가장 미래적인 매체다. 라꾸 소성 기법이 지닌 ‘우연의 수용’이라는 철학은 2200년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며, 오히려 기술의 정점에서 인간의 손맛과 자연의 변덕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이다. 결국 미래의 도자 예술은 무엇을 만드느냐의 문제를 넘어, 어떻게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그 흔적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라꾸에서 찾게 될 것이다. 불 속에서 건져 올려진 한 점의 기물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창의성과 자연의 거대함이 만나는 지점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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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한중칼럼] 예술로 잇는 신(新) 실크로드, 허베이미술대학과 한국 문화예술의 교류 가치
[대한기자신문 김지윤 한중문화칼럼니스트] 오늘날 국제 관계에서 ‘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특히 지리적·역사적으로 밀접한 한중 관계에서 예술은 정치적 경직성을 완화하고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가장 세련된 외교 수단이다. 그 중심에 중국 최대 규모의 사립 예술 명문인 허베이미술대학(Hebei Academy of Fine Arts)이 있다. 독보적인 건축 양식과 거대한 인프라를 갖춘 허베이 미대와 창의적 콘텐츠 역량을 지닌 한국 문화예술의 만남은, 단순한 교육 협력을 넘어 아시아 예술의 외연을 세계로 확장하는 ‘예술 외교의 교두보’로서 막대한 가치를 지닌다. 융합과 상생, 예술로 그리는 미래 설계도, ‘미학적 융합’ 동양의 정신과 현대적 기술의 만남 허베이 미대는 전통 회화와 조형 예술에서 강점을 지니며, 한국은 K-아트와 디지털 미디어 분야에서 세계적인 감각을 보유하고 있다. 양국의 교류는 유교와 불교라는 공통된 문화적 자양분을 바탕으로 ‘아시아적 미학의 현대적 재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한국의 ICT 기반 미디어 아트와 허베이 미대의 조형 예술 역량이 결합한다면, 서구 중심의 현대 예술계에 새로운 대안적 가치를 제시하는 독창적인 콘텐츠를 탄생시킬 것이다. 인적·경제적 가치, 한중 청년 예술가를 위한 글로벌 플랫폼 예술 교육 기관 간의 교류는 미래 세대를 위한 실질적인 기회의 장을 마련한다. 허베이 미대가 조성 중인 대규모 예술 산업 클러스터는 한국의 기획력과 결합해 거대한 문화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교수진과 학생들의 상호 방문, 워크숍, 공동 프로젝트는 청년 작가들에게 ‘글로벌 무대’를 제공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일자리 창출과 산업적 성공 모델로 이어지는 실리 외교(Pragmatic Diplomacy)의 핵심이 된다. 예술 외교의 역할,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무는 힘 국가 간 이해관계로 소통이 단절될 때, 예술은 가장 먼저 장벽을 허무는 역할을 수행한다. 대학이라는 공신력 있는 기관을 통한 교류는 영리적 목적을 넘어 학문적·정서적 신뢰를 쌓는 밑거름이 된다. 양국의 청년들이 함께 창작하며 쌓은 우정은 향후 어떤 외교적 마찰도 이겨낼 수 있는 강력한 인적 자산이 되어, 양국 관계의 지속 가능한 다리 역할을 할 것이다. 경제적 자생력 확보‘비즈니스 모델 구축’ 요컨대 후원에만 의존하는 교류는 한계가 있다. 스스로 수익을 내는 구조가 필요하다. 아트 커머스 플랫폼 연계, 교류전에서 발표된 우수 작품을 양국의 이커머스나 옥션 시장에 상설 노출하고 판매할 수 있는 온·오프라인 유통 채널을 구축해야 한다. 또 기업 콜라보레이션 유치, 예술가들의 창의력을 기업의 제품 디자인이나 마케팅에 접목하여 기업의 후원을 이끌어내고, 작가들에게는 실질적인 수익을 제공하는 비즈니스 매칭 시스템이 필요하다. 심정적 연결고리를 넘어 글로벌 허브로 결론적으로 허베이 미술대학과 한국 문화예술의 교류는 ‘심정적 연결고리(Heart-to-Heart)’이자 예술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전환하는 ‘실용적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예술은 국경을 나눌 수 없으며, 예술은 국경을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든다. 허베이 미대가 주도하는 이 예술적 연대는 한중 관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마중물이 될 것이며, 나아가 동북아시아가 세계 문화 콘텐츠의 중심지로 도약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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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교수의 칼럼] 경계를 허무는 혁신의 용광로, 예술 산업에 ‘해커톤(Hackathon)’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
- [대한기자신문 김지윤 한중문화칼럼니스트]오늘날 예술 산업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메타버스와 같은 첨단 기술이 예술의 창작과 유통, 향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급변하는 생태계 속에서 예술계가 직면한 과제는 명확하다. 어떻게 ‘전통적 심미성’을 유지하면서 ‘현대적 기술’과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 이에 대한 가장 혁신적인 해답으로 나는 예술 해커톤(Arts Hackathon)의 활성화를 제안한다. 해커톤은 본래 '해킹(Hacking)'과 '마라톤(Marathon)'의 합성어로,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이 팀을 이뤄 제한된 시간 내에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협업 모델이다. 이것이 예술 산업에 도입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예술의 지속 가능성과 확장성을 담보할 핵심 엔진이기 때문이다. ◈ ‘낯선 결합’을 통한 창의적 파괴와 혁신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만의 작업실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창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현대 예술 산업의 난제들은 작가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해커톤은 예술가, 엔지니어, 데이터 분석가, 마케터를 한자리에 강제로 모아놓는 ‘창의적 용광로’ 역할을 한다. 예술가는 기술자에게 영감을 주고, 기술자는 예술가에게 불가능했던 표현의 도구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무용가와 센서 기술 개발자가 만나 무용수의 움직임을 실시간 데이터 시각화로 구현하거나, 화가와 블록체인 전문가가 만나 작품의 이력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솔루션을 도출하는 과정은 오직 해커톤이라는 밀도 높은 협업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이종 교배’는 기존 예술계의 관성적인 사고를 깨뜨리는 창의적 파괴를 일으킨다. ◈ 예술의 비즈니스 모델(BM) 다각화와 생존 전략 예술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는 ‘원화 판매’ 혹은 ‘공공 보조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취약한 수익 구조에 있다. 해커톤은 예술적 아이디어를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하는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의 장이 된다. 해커톤에 참여한 예술 전공자들은 자신의 창의성을 어떻게 서비스화(SaaS)할지, 어떻게 구독 경제 모델로 연결할지, 혹은 어떻게 예술 경험을 상품화할지 고민하게 된다. 24~48시간이라는 극한의 시간 제한은 완벽주의에 빠지기 쉬운 예술가들에게 ‘최소 기능 제품(MVP)’을 빠르게 시장에 내놓고 피드백을 받는 훈련을 시킨다. 이는 예술가가 단순한 창작자를 넘어 자신의 가치를 경영할 줄 아는 ‘아트프리너(Art-preneur)’로 거듭나게 하는 실전 훈련소와 같다. ◈ 관객 경험의 혁신, ‘보는 예술’에서 ‘참여하는 예술’로 현대 관객, 특히 MZ세대와 알파 세대는 일방적인 감상보다 상호작용과 참여를 원한다. 예술 해커톤은 관객의 경험(UX)을 극대화하는 기술적 솔루션을 찾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증강현실(AR)을 활용해 갤러리 밖에서도 도슨트 설명을 듣게 하거나, 관객의 뇌파를 측정해 실시간으로 변하는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는 등의 시도는 모두 해커톤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새로운 향유 방식은 예술의 문턱을 낮추고, 잠재적 관객층을 넓히는 효과를 가져온다. 예술 산업이 대중과 멀어지지 않고 동시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커톤을 통한 끊임없는 ‘경험의 프로토타이핑’이 수반되어야 한다. ◈ 예술 생태계의 민주화와 네트워킹의 확장 전통적인 예술계는 견고한 학벌이나 인맥, 특정 갤러리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해커톤은 오직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평가받는 능력 중심의 장이다. 이곳에서 무명의 청년 예술가는 거대 IT 기업의 개발자와 팀원이 되어 대등하게 토론하며, 자신의 철학을 기술 세계에 이식한다. 이러한 수평적 네트워킹은 예술 산업 내의 권력 구조를 해체하고, 더 많은 신진 인재가 산업 전면에 등장하게 하는 민주적 통로가 된다. 또한, 해커톤을 통해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는 행사 종료 후에도 실제 스타트업 창업이나 공동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강력한 자산이 된다. ◈ 예술, 기술의 옷을 입고 미래로 나아가다 예술 해커톤은 단순히 앱을 만들거나 기계를 조립하는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 사유(Artistic Thinking)를 사회적 해결책(Social Solution)으로 치환하는 거대한 실험이다. 예술 산업이 박물관 속의 유물로 남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진화하기 위해서는, 해커톤이라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술가는 기술을 두려워하는 대신 기술을 ‘새로운 붓’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경영자는 예술적 영감을 ‘혁신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해커톤의 밤을 밝히는 예술가와 개발자들의 열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술이 자본과 기술의 하인이 아닌, 미래 산업의 진정한 설계자가 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예술 산업의 내일은 작업실이 아닌, 이 뜨거운 해커톤의 현장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예술경영 전문가의 제언: 만약 예술 전공 대학생들이 해커톤에 참여한다면, 자신의 기법적 우수함을 뽐내기보다 "나의 예술적 철학이 기술과 만났을 때 세상의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해커톤에서 우승하고, 나아가 성공적인 창업으로 이어지는 핵심 전략입니다.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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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교수의 칼럼] 경계를 허무는 혁신의 용광로, 예술 산업에 ‘해커톤(Hackathon)’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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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억겁의 시간 너머 맞닿은 ‘한 뿌리 다른 꽃’, 설과 춘절의 사회학
- [대한기자신문 이창호 발행인] 입춘대길(立春大吉)의 묵향이 채 가시기도 전, 동아시아의 대지는 다시 한번 거대한 이동의 물결에 요동친다. 한국의 ‘설’과 중국의 ‘춘절(春节)’. 달의 주기를 따라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이 두 명절은 유교적 문화권이라는 거대한 자장(磁場) 안에서 태동했으나, 각기 다른 역사적 토양 위에서 서로 다른 빛깔의 꽃을 피워냈다. 단순히 ‘쉬는 날’을 넘어 한 민족의 정체성과 가족 공동체의 원형을 확인하는 이 두 명절의 이면에는 어떤 문화적 기호가 숨겨져 있을까. ● 고요한 성찰의 시간, 한국의 ‘설’ 한국의 설은 ‘삼가다’라는 뜻의 ‘사리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새해의 첫날을 그저 들뜬 축제로 맞이하기보다, 몸가짐을 정돈하고 경거망동을 삼가며 한 해의 운수를 경건히 맞이하려는 선조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한국 설의 핵심은 ‘수직적 결합’과 ‘내면적 위로’에 있다. 이른 아침, 정갈하게 차려낸 차례상 앞에서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정신적 가교'다.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올리는 세배는 단순한 용돈 벌이가 아닌, 세대 간의 내밀한 축복이자 질서의 확인이다. 음식에서도 그 성격이 드러난다. 흰 떡국 한 그릇은 지난날의 묵은 때를 벗고 백지 위에 새로운 일기를 써 내려가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다. 한국의 설은 왁자지껄한 소음보다는 가족들이 둘러앉아 덕담을 나누는 낮은 목소리의 온기로 채워진다. 이는 농경 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면서도 개별 가문의 가풍을 중시했던 한국 특유의 유교 문화가 투영된 결과다. ● 거대한 생명력의 폭발, 중국의 ‘춘절’ 반면 중국의 춘절은 ‘수평적 확장’과 ‘역동적 환희’의 무대다. 고대 전설 속 괴물 ‘년(年)’을 쫓아내기 위해 붉은 종이를 붙이고 폭죽을 터뜨리던 풍습에서 기원한 만큼, 춘절의 기운은 강렬하고 뜨겁다. 중국인들에게 춘절은 겨울의 끝과 봄의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선언이다. 집집마다 붙이는 ‘춘련(春联)’과 거리를 수놓는 홍등(紅燈)은 복(福)이 들어오길 바라는 적극적인 염원의 산물이다. 한국의 설이 차분한 묵조(默照)의 시간이라면, 중국의 춘절은 온 세상이 붉게 타오르는 축제의 시간이다. 특히 춘절 음식인 ‘교자(饺子)’는 그 형태가 옛 화폐인 원보(元寶)를 닮아 부(富)를 기원하는 세속적이고도 솔직한 욕망을 담고 있다. 가족이 모여 만두를 빚으며 밤을 지새우는 ‘수세(守歲)’ 풍습은 거대한 대륙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확인하고 서로의 생존을 축하하는 강인한 생명력의 표출이기도 하다. ● 자본주의와 만난 전통, 그리고 변치 않는 가치 21세기에 들어서며 '설과 춘절'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한국의 ‘명절 증후군’과 중국의 ‘춘운(春運, 춘절 대이동)’은 현대 사회가 전통 명절에 부과한 피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작금 핵가족화를 넘어 1인 가구가 보편화된 시대, "가족이 반드시 모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사회적 화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설과 춘절을 기다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속도와 효율만이 강조되는 무한 경쟁의 궤도에서 잠시 내려와, 나의 뿌리를 확인하고 타인(가족)의 안부를 묻는 '인간적인 시간'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떡국 한 그릇과 중국의 교자 한 접시는 결국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다"는 위로 말이다. 설과 춘절은 단순한 역법상의 날짜가 아니다. 그것은 '억겁의 세월' 동안 동아시아인의 DNA에 각인된 '회귀(回歸)'의 본능이며, 차가운 겨울을 뚫고 올라오는 봄의 전령사다. 형상은 다르되 본질은 하나인 이 두 명절을 통해, 우리는 다시금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 글/사진: 이창호(李昌虎) 한중교류촉진위원회 위원장 겸 국제다자외교평의회 대표(의장), 한중기자연맹 회장, 중국 곡부사범대학 겸직교수, 위해직업대학 객좌교수, 허베이미술대학 명예/종신교수, Marquis Who’s Who 등재 저자, 《새 시대를 이끄는 시진핑과 한중관계》 저자.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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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획] 억겁의 시간 너머 맞닿은 ‘한 뿌리 다른 꽃’, 설과 춘절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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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의 예술경영 칼럼] 예술가여, '사업'이 아닌 '세계관'을 확장하라, 예술 창업의 철학적 패러다임 전환
- [대한기자신문 김지윤 한중문화칼럼니스트] 전통적으로 예술과 경영은 물과 기름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예술은 '순수한 정신의 산물'로, 경영은 '차디찬 자본의 논리'로 치부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미술 생태계에서 예술가에게 창업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보조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예술적 철학을 사회라는 거대한 캔버스에 투사하는 확장된 창작 활동'입니다. 예술 전공자들이 창업을 기술적 절차가 아닌 철학적 확장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와 그 구체적인 전략적 방안을 제시합니다. ◈ 창업을 '철학적 확장'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 작가적 정체성(Identity)의 보존과 강화입니다. 특히 기술적 관점, 즉 '무엇을 팔 것인가'에만 매몰된 창업은 시장의 유행에 휩쓸리기 쉽습니다. 이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파편화하고 결국 '창작의 고갈'을 초래합니다. 반면, 창업을 자신의 철학적 결과물로 인식할 때,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됩니다. 이 경우 상업적 활동은 예술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새로운 매체가 되어 작가의 세계관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관객과의 '철학적 공명'을 통한 팬덤 형성입니다. 현대 소비자는 상품의 기능보다 브랜드가 가진 '서사(Narrative)'와 '철학'에 반응합니다. 미술 전공자가 자신의 미학적 가치를 비즈니스 언어로 번역하여 제안할 때, 관객은 단순한 구매자를 넘어 작가의 철학에 동참하는 '후원자'이자 '팬'이 됩니다. 이러한 정서적 유대는 기술적 마케팅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지속 가능한 경쟁력이 됩니다. 예술적 실천의 사회적 영토 확장입니다. 캔버스나 조각대 앞에 머물던 예술가의 사유가 경영이라는 도구를 만나면 전시장을 넘어 도시의 거리, 사람들의 일상, 사회적 문제 해결의 현장으로 뻗어 나갑니다. 창업은 예술가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혁신하고,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는 가장 능동적인 실천입니다. ◈ 철학적 확장을 위한 전략적 방안 예술경영 컨설팅의 관점에서 미술 전공자들이 취해야 할 전략은 '가치(Value)'에서 출발하여 '시스템(System)'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 '가치 제안(Value Proposition)'의 미학적 재정의 가장 먼저 수행해야 할 작업은 자신의 작업을 '제품'이 아닌 '가치의 경험'으로 재정의하는 것입니다. • 전략, 비즈니스 모델 캔버스의 중심에 '작가 선언문(Artist Statement)'을 배치하십시오. "나는 회화를 판매한다"가 아니라 "나는 바쁜 현대인에게 0.1mm의 정밀함이 주는 평온의 미학을 제공한다"는 식의 가치 제안이 필요합니다. 이 철학적 뿌리가 단단할 때 제품은 그림에서 오브제, 서비스, 공간 기획으로 무한히 변주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관계의 미학'을 적용한 서비스 디자인 현대 미술의 '관계적 미학(Relational Aesthetics)' 이론을 경영 프로세스에 도입하십시오. • 전략, 단순히 완성된 결과물을 판매하는 시스템을 넘어, 관객이 작가의 사유 방식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설계해야 합니다. 제작 과정의 서사를 공유하는 멤버십 모델, 작가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티형 워크숍 등이 그 예입니다. 이는 경영을 '거래'가 아닌 '관계의 창출'로 인식하는 철학적 접근입니다. 세 번째, STP 전략: '철학적 공명층'의 세분화와 타겟팅 모두를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예술적 색채를 흐리게 합니다. • 전략, * Segmentation, 인구통계학적 구분이 아닌, 나의 미학적 메시지에 반응할 '정서적/철학적 집단'을 세분화하십시오. • Targeting,그중 나의 예술적 위로 혹은 질문이 가장 절실한 타겟을 선정하십시오. • Positioning, 관객의 머릿속에 "이 브랜드는 나의 실존적 고민을 예술적으로 해결해 주는 유일한 창구"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네 번째,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을 통한 예술적 실험 창업의 과정을 실험 미술의 연장선으로 이해하고 접근하십시오. • 전략: 거창한 사업 자금과 대규모 시설에 집착하기보다, 자신의 철학적 아이템을 최소 단위로 구현하여 단기간에 제품을 만들어 시장의 반응을 다음 제품에 반영하ㅇ는 것을 반복하시고 살피십시오. SNS를 통한 작업 일지 공유, 팝업 전시 등을 통해 대중의 피드백을 수집하고, 이를 다시 자신의 예술 철학과 버무려 비즈니스 모델을 정교화해 나가는 '예술적 피드백 루프'를 구축해야 합니다. ◈ 창의성을 경영하는 혁신가로서의 예술가 정부가 1인 창업을 지원하는 이 시점은 예술가들에게 위기가 아닌 기회입니다. 경영은 예술의 순수성을 해치는 독이 아니라, 예술이 사회라는 척박한 땅에서 시들지 않고 꽃피울 수 있게 돕는 '양분'입니다. 미술 전공자 여러분, 여러분의 창의성을 골방에 가두지 마십시오. 경영이라는 캔버스 위에 여러분의 철학을 그리십시오. 기술적 절차는 전문가에게 맡기거나 학습하면 되지만, 여러분이 가진 고유한 '철학적 씨앗'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세계관을 비즈니스로 확장하는 순간, 여러분은 단순한 예술가를 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문화 혁신가(Cultural Entrepreneur)'가 될 것입니다.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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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의 예술경영 칼럼] 예술가여, '사업'이 아닌 '세계관'을 확장하라, 예술 창업의 철학적 패러다임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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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신춘문예 출신 작가 송정자의 '가시박'
- 가시박 송정자/ 수필가, 지구일보 신춘문예 당선 마른 잎들이 낯빛을 바꾸고 있다. 한때 붉었던 전성기를 접으며 낙하 준비를 한다. 어느 날은 심하게 맞은 볼때기를 만지며 때리는 갯바람을 미워하고, 또 어떤 날은 빗방울 샤워를 시켜준 비님이 고마워 더욱 반짝거렸을 테지. 고운 빛깔을 가진 노란 은행잎을 시기하며 곱게 물들지 못한 점박이 잎 신세에 한숨짓기도 했을 거야. 치열했던 한해살이를 접어 보내느라 연신 잎을 떨구고 있다. 고즈넉한 한강 길이다. 인적이 없는 산책길에서 노을의 정경을 바라본다는 문단 선배의 초대로 다섯 여인이 행주나루터에 모였다. 늦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자며 고조된 기분으로 한강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예전에 행주대교가 바라보이는 나루터 쪽은 강변의 돌방구지가 있던 백사장이었다. 지금은 온통 뻘밭이다. 더러 발밑에서 숨구멍을 내어 뻐끔거리는 참게는 바다로 내려가는 길목에 통발을 치면 잡힌다고 한다. 이 곳은 어획량이 풍부해 아직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밀물 때는 갯고랑 수풀 속으로 그물을 치면 먹이활동을 하는 장어도 잡힌다. 생태계의 고요한 움직임, 낙엽이 한해를 갈무리 하는 모습, 장어가 살찌우는 소리, 길을 걷는 여인들의 수다, 모든 풍경이 화음이 되어 길을 채운다. 마치 말러의 교향곡, ‘아침 들을 거닐면’이 들리는 듯하다. ‘밝고 경쾌한 아침 들을 거닐면 이 세상은 아름답다고 작은 새가 말을 거네.’ 사뭇 가뿐하게 이어지는 플루트의 짧은 전주를 이어받아 관현악의 중간부에 들어가면 해돋이의 정경이 묘사되며 이어 제3부로 접어든다. ‘모든 것이 햇빛에 붉게 타고 음과 빛깔로 가득 차네’ 최초의 선율이 재현되며 행복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일까, 하고 물으며 감미로운 악상으로 바뀌듯, 층층이 마른 풀내음을 들이키며 행주나루 길의 잔잔한 흙 공기에 젖어 갈 즈음이었다. 늦가을로 접어든 들판에 마지막까지 욕망을 놓지 못하는 ‘가시박’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강변길을 장악한 상태였다. 이파리는 이미 숨을 다한 종잇장이 되어 말라붙었다. 덩굴만 생태식물의 숨통을 잡고 여전히 감아 오른다. 서리 맞은 줄기마다 엉킨 가시는 투명한 살얼음을 달고 바람이 일 때마다 긁어대는 소리가 난다. 한강을 바라보며 피어올린 풀잎들과 나무는 빛을 잃은 채, 가시박이 쳐놓은 그물 속에 갇혀버렸다. 햇살에 닿지도 못하고 땅 속으로 파고들어갈 씨앗조차 품지 못한다. 함박눈이라도 쏟아져 하얗게 한강변을 덮는다 해도 가시박만은 목 끝을 차올려 유령처럼 떠다닐 기세다. 허락하지 않은 불청객이 따로 있으랴.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정했을 만큼 악명이 높다. 줄기에 난 거친 가시 때문에 제거작업에 난황을 겪는다고 한다. 제초제를 뿌리면 키우는 작농식물이 해를 입을까봐 쓰지 못하고, 농사짓는 이들의 애가 탈 것은 자명해 보인다. 아침 뉴스를 보다가 다시 가시박이 떠올랐다. 아파트에 사는 학부모가 아이에게 빌라에 사는 친구와 놀지 못하게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지천으로 늘린 요즘 시대의 아파트가 무슨 주거계급이라도 된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의 불안이 집의 차별로 변질된다면 아이는 집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무차별하게 뒤덮는 가시박 같은 부모의 의식을 아이들 시선에 투영시켜서야 되겠는가. 가시박은 한겨울에도 감은 덩굴을 풀지 않는다. 자기 생존을 넘어 다른 식물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다. 빛을 가로채어 길을 막고, 스스로의 영역을 자연의 순리로 오인한다. 빌라에 사는 친구와 놀지 말라는 말은 보호가 아니라 아이의 세계에 금을 긋는 가시박의 덩굴이 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한삼덩굴과 힘겨루기라도 하는지 잎 모양이 흡사한 한해살이 외래종 덩굴식물이다. 만져보면 단면에 각이 져있지만, 줄기는 곱슬곱슬하고 부드러운 털이 밀생한다. 끝이 서너 갈래로 갈라져 잎자루 마디마다 무기 같은 덩굴손이 있다. 전국의 하천부지, 저수지, 농수로 주변 길가나 숲 가장자리를 돌며 약습에서 적습까지 서식한다. 이미 낙동강, 사대강 수계부터 서식지를 넓혀 수도권의 강변까지 점령한 상태다. 무서운 속도가 아닌가. 호박잎처럼 갈라진 덩굴손이 뻗어 나와 땅위를 기어 다니다가 다른 식물을 덮치면서 높은 나무까지 타고 올라간다. 마치 거대한 황무지를 치유하려는 듯 숲 전체를 쓰나미처럼 쓸어버린 형국이다, 소중한 아이들을 가시박의 그늘에 가두려는 것일까. 한강변 매서운 바람 앞에서도 가시박이 거친 덩굴을 놓지 않듯이, 지나친 관념에 사로잡힌 어른이 아이들의 동심에 차별의 굴레를 씌우려 한다. 죽은 잎으로도 다른 생태의 숨통을 옥죄고 있는 가시박처럼 차별 역시 다음 세대로 뻗어갈 씨앗과 거름을 뽑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차별은 보호가 아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말라붙게 하는 명분이 어른들의 내려놓지 못하는 덩굴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아이들의 동심을 질식시키고 얼려버린다는 것을 이제 자각해야하지 않을까. 오후 햇살은 이미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러의 제3곡 ‘타는 듯한 단검으로’의 음률로 전환되고 있다. 관현악에 의한 열광적이고 거친 전주 뒤에, 단조의 미친 듯한 선율로 바뀌어간다. 이 선율은 ‘가슴에는 타는 듯한 단검이 낮에도 밤에도 잠자는 동안에도 나를 괴롭히네’ 라며 폭발적으로 고조된다. 관현악도 함께 응하며 격렬하게 울려 퍼지다가 장조로 바뀐다. 미친 듯이 고조되는 음율 끝에는 쓸쓸함이 배인 ‘아 검은 관에 눕고 싶다’로 최후의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강열하게 타고 올라가던 가시박이 마치 쉬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무언의 알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후일까. 다섯 여인을 쫓아오던 낮달이 저 만치 보낸 오후의 해거름 앞에 발걸음을 정착하고 있다. 해넘이 준비를 하는 행주나루터 물길이 마치 그물막 속에 갇힌 아이들을 비추려는지, 회색 가시박 덤불에다 어둠이 오기 전, 가장 뜨거운 노을빛을 얹고 있다. ▼송정자 한국수필 등단. 지구일보 신춘문예 당선,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미리내수필문학회 회원, 동대문문인협회 감사,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동인, 설총문학상, 동대문문학상, 제3회 권대근문학상 수상, 수필집 『f홀의 위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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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신춘문예 출신 작가 송정자의 '가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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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종교', 정치의 조직이 되는 순간, 신앙은 무너진다
- [대한기자신문 사설] 더 이상 둘러 말할 필요가 없다. 종교가 제 역할을 벗어나 정치와 결합하는 순간, 신앙은 퇴색되는 정도가 아니라 붕괴의 길로 접어든다. 위로와 성찰, 희망을 제공해야 할 종교 공간이 선거 전략의 전초기지로 활용될 때, 그곳에는 신의 이름만 남고 신앙의 본질은 사라진다. 최근 일부 종교 세력이 특정 정치 세력과 노골적으로 밀착하며 정치적 발언을 쏟아내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문제는 이것이 사회적 양심이나 보편적 가치의 발언이 아니라, 특정 후보와 진영을 노골적으로 지지·동원하는 행태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의 언어가 공약을 포장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설교가 정치적 구호로 변질될 때, 종교는 더 이상 초월적 가치를 말할 자격을 상실한다. 정교분리는 단순한 형식적 원칙이 아니다. 이는 다원적 사회에서 종교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자율 장치다. 그럼에도 일부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이 안전장치를 걷어차고 정치의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신앙 공동체는 분열되고, 종교는 사회적 신뢰를 급속도로 잃는다. 신도들은 더 이상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갈라진다. 정치권의 책임은 더욱 무겁다. 종교의 조직력과 영향력을 선거에 활용하려는 계산된 접근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한다. 특정 종교를 등에 업고 권력을 획득하려는 정치 세력은 결국 종교를 소모품으로 만들고, 종교 역시 권력의 그림자 속에서 도덕적 권위를 상실한다. 이 과정에서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는 정치적 거래의 대상이 되고 만다. 종교는 권력을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의 편에 서는 순간, 그 기능은 즉시 무력화된다. 역사적으로 종교가 정치와 결탁해 얻은 것은 영향력이 아니라 오명과 붕괴였다. 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옹호했던 사례들은 예외 없이 종교 자체의 몰락으로 귀결됐다. 종교는 '위로와 희망'의 공간이어야 한다. 정치의 무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신앙은 표가 아니며, 신도는 동원 대상이 아니다. 종교가 이 단순한 진실을 외면할수록, 사회는 더 깊은 갈등 속으로 빠져들고 종교는 회복하기 어려운 신뢰의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명확한 선 긋기다. 종교는 정치로부터 물러나야 하고, 정치는 종교를 이용하려는 유혹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을 지키는 길이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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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종교', 정치의 조직이 되는 순간, 신앙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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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행복, 어디에 있을까
-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행복을 묻는 질문은 오래되었지만, 요즘처럼 자주 던져지는 시대도 드물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고, 기술은 편리해졌지만 삶은 더 바빠졌다. 우리는 더 많이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자주 공허함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묻는다. 행복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많은 이들이 행복을 조건으로 이해한다. 일정한 소득, 안정된 직업, 무탈한 가정, 사회적 인정. 이런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스럽게 행복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조건을 충족해도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목표를 이루는 순간의 기쁨은 잠깐이고, 곧 더 높은 기준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행복이 자꾸 뒤로 미뤄지는 이유다. 문제는 행복을 미래형으로 설정하는 데 있다. 우리는 지금의 삶을 ‘과정’으로 여기고, 행복은 언젠가 도착할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사고방식 속에서 현재는 늘 부족하다. 더 나아져야 하고, 더 견뎌야 하며, 더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 된다. 그렇게 오늘은 내일을 위한 희생물이 되고, 삶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하지만 행복은 그렇게 도착하는 목적지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감정과 상황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태에 가깝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누군가는 불만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무사히 지나간 하루로 받아들인다. 차이는 조건이 아니라 인식에 있다. 행복은 외부에서 주어지기보다, 현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현재에 머무는 연습을 거의 하지 않는다. 과거의 선택을 곱씹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데 익숙하다. 이 사이에서 현재는 늘 사라진다. 불안은 미래에서 오고, 후회는 과거에서 오지만, 정작 우리가 살아내는 시간은 언제나 지금이다. 행복이 지금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특별한 사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 큰 감정의 파동이 없는 상태는 흔히 ‘평범함’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것은 이런 평범한 시간들이다. 무사함, 안정감, 예측 가능성은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지속적인 행복의 기반이다. 또 하나 놓치기 쉬운 사실은, 행복이 늘 긍정적인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안과 슬픔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런 감정이 삶 전체를 잠식하지 않도록 중심을 유지하는 일이다. 현재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다. 이것은 행복을 유지하는 현실적인 힘이다. 행복을 찾기 위해 삶을 크게 바꿀 필요는 없다. 속도를 조금 늦추고, 비교를 줄이며, 지금의 상태를 완전히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은 달라진다. 더 나은 삶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더 나은 삶을 위해 지금의 삶을 부정하지 말자는 제안이다. 결국 “행복,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은 이렇게 귀결된다. 우리는 행복을 너무 멀리 두고 있지 않은가. 행복은 완벽한 조건 뒤에 숨어 있는 보상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는 방식 속에 있다. 지금의 삶을 임시가 아닌 본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행복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행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 ☞ 위 내용에 관해 조금 더 관심 있는 분은 필자가 집필한 “행복, 어디에 있을까” 에세이를 교보문고 등을 통해 e-Book으로 만나보실 수 있음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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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행복,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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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봉수대에 오르니
- [대한기자신문] 봉수대에 오르니 詩 김채원 산마루 바람이 묵은 해의 먼지를 털어내고 새해의 빛을 먼저 건네온다. 도시는 아래에서 숨을 고르고 연기 대신 기도가 하늘로 오른다. 어제의 근심은 골짜기에 묻고 오늘의 마음은 능선을 따라 맑아진다. 멀리 집마다 켜질 저녁 불빛, 그 하나하나가 서로의 안부가 되고 살아 있음의 인사가 되리라. 나는 두 손 모아 가까운 이와 먼 이를 함께 떠올리며 올해는 조금 더 따뜻하게 서로를 부르리라 다짐한다. 봉수대의 빈 하늘에 첫 마음을 띄운다 평안하라, 오늘의 세상아. [해설]명절은 흔히 가족의 시간으로만 이해되지만, 설날은 본래 개인의 안부를 넘어 사회 전체의 안녕을 기원하던 공동체 의례였다. 이 시는 그 잊혀가는 의미를 ‘봉수대’라는 상징적 공간을 통해 다시 불러낸다. 봉수대는 과거 국가의 위급함을 알리던 신호의 자리였다. 그러나 시 속에서 그 연기는 사라지고 대신 기도가 오른다. 경계의 장치가 평안의 장소로 바뀌는 순간, 독자는 우리가 지나온 시대와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시대의 거리를 자연스럽게 성찰하게 된다. 화자는 산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보는 시선은 우월함이 아니라 거리두기를 통한 자기 성찰의 시선이다. 아래의 도시는 ‘숨을 고르고’, 골짜기는 근심을 묻는 자리로 제시된다. 이는 설날이 단순한 새 출발의 선언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곧 새해란 달력의 교체가 아니라 태도의 변화라는 점을 조용히 환기한다. 특히 “집마다 켜질 저녁 불빛”은 이 시의 정서적 중심이다. 불빛은 각자의 삶이지만 동시에 서로의 생존 신호다. 명절의 인사가 형식으로 남은 시대에, 시는 안부의 본래 의미를 복원한다. 살아 있음 자체가 서로에게 건네는 인사라는 인식은, 경쟁과 속도의 일상 속에서 잊히기 쉬운 공동체 감각을 되살린다. 결국 이 작품에서 봉수대는 외부의 적을 알리던 시설이 아니라 내면을 밝히는 자리로 전환된다. 시의 마지막 “평안하라, 오늘의 세상아”라는 구절은 개인의 소망을 넘어선다. 가족을 위한 기원이 사회를 향한 기도로 확장되는 지점에서, 설날은 사적인 의례에서 공적인 윤리로 격상된다. 이 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새해는 더 나은 계획을 세우는 날이 아니라, 서로를 다시 부르는 날이라는 것. 봉수대에 올린 첫 마음은 결국 타인을 향한 마음이며, 그 마음이야말로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가장 오래된 신호임을 조용히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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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봉수대에 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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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9) 김정애 '상처의 마모, 그 찬란한 ‘되기’의 미학‘
-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9) 김정애 ‘상처의 마모, 그 찬란한 ‘되기’의 미학‘ 문윤정의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 김정애/ 문학평론가 수필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은 더블린의 겨울 해변이라는 이국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바다 유리에 투영된 삶의 상처와 회복’을 깊이 있게 성찰한 작품이다.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보편적인 삶의 철학으로 확장되는 구조 또한 매우 탄탄하다. 특히 상처가 마모되어 지혜로 화(化)하는 그 역동적인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를 고정된 틀이 아닌 ‘끊임없는 생성’으로 파악하는 들뢰즈적 관점으로 이 텍스트를 읽어낼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권대근은 들뢰즈 철학을 본격수필 창작이론에 접맥한 최초의 수필학자다. 그의 창의적 역작인 『본격수필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참고하여 이 작품을 비평해보고자 한다. 유리병은 본래 액체를 담아야 한다는 기능적 영토에 유폐된 존재였다. 어느 날의 충격이 유리병을 산산이 깨뜨리고, 그와 함께 견고해 보이던 ‘지층’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파편화라는 몰락이 아니라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의 개시다. 날카로운 단면은 액체를 담는 대신 바다의 강렬한 파도와 직면하며, 고정된 목적을 잃어버린 채 유목적인 흐름 속에 몸을 던진다. 이 날선 파편에서 공포가 아닌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남’을 포착하는 작가의 눈은, 어지러운 만유의 세상에서 독특한 제재와 주제를 건져 올리는 심미안의 예리함을 보여준다. 파괴가 곧 창조적 도약이라는 역설을 문학적으로 선언하는 순간, 독자의 몰입은 한층 깊어진다. 바다는 유리를 집어삼키는 심연이 아니라, 무수한 반복을 통해 차이를 생산하는 거대한 공장이다. 조개껍데기가 생명의 주체가 빠져나간 ‘부재의 흔적’이라면, 유리조각은 외부 세계와 부딪히며 깎여나가는 ‘현존의 투쟁’이다. 파도는 수만 번 같은 몸짓으로 유리를 밀어 올리지만, 그 반복은 단 한 번도 동일하지 않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의 원리처럼, 유리조각은 매 순간 미세하게 깎여나가며 어제의 자신과 결별한다. “모래알 사이에서 자신을 잘 연마해온 작은 조각”이라는 표현은 고통의 반복이 어떻게 영혼의 고유한 강도(强度)를 높여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연마의 시간은 상처를 지우는 망각의 시간이 아니라, 상처를 자기 삶의 유일무이한 문양으로 새겨 넣는 생성(Devenir)의 시간이다. ‘바다 유리’는 작가와 메리 이모, 그리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슬픔을 잇는 리좀(Rhizome)의 마디가 된다. 메리 이모가 건넨 유리조각은 수직적 교훈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들끼리 나누는 수평적 마주침의 신호다.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이라는 제목은 이 수필의 핵심을 꿰뚫는다. 우리는 모두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접속되어 흐르는 존재들이다. 더블린의 해변과 한국의 서해안을 흐르는 소주병의 파편은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유리조각이라는 미미한 사물을 통해 타자의 고통에 접속하고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는 ‘배치(Agencement)’의 예술을 보여준다. 결말에서 인용된 조각가의 비유는 들뢰즈의 ‘자기 생성’ 철학의 정점에 놓인다. 완성을 향한 조각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깎아내며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작가는 유리조각을 보며 “자신을 곧추세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상처가 없던 과거로 돌아가는 회복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상처 입은 자 되기’의 완성이다. 불투명해진 유리가 빛을 반사하는 대신 은은하게 머금듯, 작가는 고통을 삶의 배경으로 수용하며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생성을 멈추지 않는다. 조개껍데기는 강탈당한 알맹이(상실)에 대한 연민이다. 반면 유리조각은 날카로운 상처가 시간(파도)을 통해 둥글어지는 과정, 곧 성숙의 시간을 그려낸다. 이를 작가는 조각가가 고통을 깎아내어 영혼을 빚는 수련의 과정에 비유했다. 유리조각을 상처, 치유, 시간, 연마, 영혼으로 확장하지만, 한 번도 설명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파도에 쓸리고 모래알에 쓸리어 원래의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듯하다.” 이 문장은 독자에게 인생의 비유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숙련된 작가의 면모가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작품은 부서진 것들의 잔해 위에서 어떻게 새로운 삶의 형식이 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서정적 투쟁기이다. 작가는 날카로운 비애를 둥근 지혜로 치환시키는 언어의 연금술사로,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바다에서 자신만의 조각을 빚고 있는 유목민임을 일깨워준다. 상처를 대하는 태도의 품격이 느껴진다. 상처를 미화하지 않고, 치유를 성급히 말하지 않으며, 삶을 ‘견뎌낸 결과물’로 보여줌으로써 ‘상처의 마모(磨耗)’라는 근원적인 위로를 독자에게 건네고 있다. 특히 마지막 문장 “얼마 동안 조각해야 아름다운 영혼이 될까”라는 자문은 독자의 가슴에 긴 여운(강도)을 남기는 훌륭한 마무리다. ▮김정애 주요 약력 △부산 출생 △윤리교육학 석사 △문학언어치료학 박사 △‘에세이문예’ 수필 등단(2012), 평론 등단(2013) △(사)부산수필문학협회 회장 △다스림문학동인 회장 △(사)국제PEN한국본부부산지역위원회 수석부회장 △에세이문예 편집1부장 △설총문학상 △민들레수필문학상 △에세이문예문학상 △사유와언어문학상 △문학발전 유공 기념은장 △부산펜문학상 작품상 △한국에세이 작품상 △부산수필문학 작품상 △수필집 ‘내 마음의 엑스레이’, ‘탈춤’, ‘인연’, ‘고슴도치 사랑’ ▮문윤정의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 바람이 거칠게 부는 12월 어느 날, 더블린의 스케리스 해변을 거닐었다. 메리의 이모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산책에 나섰다. 하얀색 집이 즐비한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 해변에 도착했다. 여름 시즌에는 사람들로 붐비겠지만, 겨울이라 한적했다. 메리는 딸의 친구인데, 더블린에서 메리의 이모집에 머물렀다. 나는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습관처럼 조개껍데기를 주웠다. 알맹이를 강탈당한 구멍 난 조개껍데기에 연민의 마음을 얹었다. 그 순간 많이도 놀라고 아파했을 조개의 마음이 스친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메리의 이모는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바다 그 너머 세상을 보는 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길게 목을 빼고 바다를 응시하곤 했다. 그녀도 예쁜 돌과 조개껍데기를 줍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깨어진 유리조각이었다. 유리조각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지도 않고, 날카로운 모서리도 없다. 병 조각에는 긁힌 수많은 자국이 있다. 모서리는 닳고 닳아 둥글어졌고, 윤기 나는 몸통은 빛을 잃어버렸다. 파도에 쓸리고 모래알에 쓸리어 원래의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듯하다. 불투명한 유리조각을 들고 있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수집품에 깜짝 놀란 나는 왜 그것을 줍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바다에 오면 잘 연마된 유리조각을 줍는다고 했다. “누군가의 상처 난 가슴이 치유가 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줍게 돼요.” 그녀는 “세상살이가 이와 같지 않을까요.” 라고 덧붙였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유리 조각이 다시 아름다워지는 모습이 좋았고, 깨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수집하게 되었다’는 말에서 깊은 성찰이 느껴졌다. 메리의 이모는 연극배우라서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시각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삶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다 힘들다고 했지만, 이혼녀로서 딸 하나를 키운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유리 파편을 집어 올릴 때마다 ‘이건 다 지난 상처야.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아’라고 속삭였을 것 같다. 메리 이모는 사각형에 가까운 유리조각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파도에 흔들리면서 모래알 사이에서 자신을 잘연마해온 작은 조각이 내 손 안에서 반짝였다. 문득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삶도, 나의 삶도, 이런 유리조각 하나쯤 쥐고 오늘을 살아내는 건지도 모른다고. 보들레르는 자신의 영혼을 ‘금이 간 종’에 비유했다. 금이 간 영혼은 큰소리로 이야기해도 잦아들기만 한다고 토로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금이 간 영혼을 달래기 위해 글을 썼다. 나도 언젠가 한 번은 깊이 금이 간 적이 있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었다. 그때 나는 하루에 몇 장씩 일기를 썼다. 아무도 모르게 일기장에 기대어 낯선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들을 흘려보냈다. 그 감정의 파편들은, 빛나지도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오래도록 가슴속 어딘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메리 이모에게 삶의 지혜를 배운 후 나 역시 깨어진 유리 조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매일 부딪히는 말들,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금이 가고 깨어지는 마음, 언젠가 한 번쯤 부서진 채로 버려졌지만, 세월이라는 물결에 쓸리고 쓸려 모난 부분은 닳아지면서 나 자신을 곧추세울 수 있었다.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상흔이 아로새겨져 있다. 해안선을 따라 병조각을 줍는 행위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기도 하다. 연극하는 메리이모에게 유리조각은 상처가 지나간 자리이며 슬픔이 닿은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유리조각을 줍는 일은 부서진 것들을 놓아주고,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는 의식이었음을 깨달았다. 서해안이나 동해안에서 주운 유리조각이란 것이 대부분 초록색이거나 푸르스름한 소주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깨어진 병조각은 때론 무기가 될 정도로 그 단면이 날카롭다. 드러낸 단면에서 번뜩이는 빛은 두려움마저 든다.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낼 것만 같다. 날카로운 유리가 바다를 떠돌면서 비정형의 모서리가 점차 사라지면서 시퍼렇던 상처도 점차 아물고, 아픔은 둥글어져 간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병조각들을 통에 담아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마음이 아플 때면 하나씩 꺼내어 들여다보고 만져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상처를 견뎌낸 한 사람을 대하고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심장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날 선 마음을 접어가며 밤마다 흘렸을 슬픔 혹은 눈물의 무게를 떠올려본다. 그 누군가는 ‘나’이면서 ‘세상의 존재’들이다. 생로병사의 한중간에 서 있는 존재인데 아프지 않다고, 슬프지 않다고, 괴롭지 않다고, 마냥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의 바람과 모래와 파도에 맞서 자신을 둥글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조각가가 ‘한 부분을 끌로 쪼아 없애고, 또 한 부분을 끌로 긁어내고, 연마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우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삶이란 자신을 다듬고 깎아내는 고요한 수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깨졌다고 끝난 것도 아니고, 빛난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를 아프게 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시간을 통해 배운다. ‘조각가처럼 너의 영혼을 조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플로티누스를 떠올린다. 얼마 동안 조각해야 아름다운 영혼이 될까 <에세이문학 2025년 가을호>. ▮문윤정 《수필공원》(현 에세이문학) 등단(1998), 《인간과 문학》 평론으로 등단(2023), 건대 문학치료학과 졸업(석사), 한국문학치료학회 정회원 저서: 《답일소》 《외로운 존재는 자신을 즐긴다 》 《터키, 낯선 시간에 흐르다》 《세계 문호와의 가상 인터뷰》 《시간을 걷는 유럽인문여행》 외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수상(31회), 서울교대 평생교육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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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9) 김정애 '상처의 마모, 그 찬란한 ‘되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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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교수의 칼럼] 경계를 허무는 혁신의 용광로, 예술 산업에 ‘해커톤(Hackathon)’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
- [대한기자신문 김지윤 한중문화칼럼니스트]오늘날 예술 산업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거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인공지능(AI), 블록체인, 메타버스와 같은 첨단 기술이 예술의 창작과 유통, 향유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급변하는 생태계 속에서 예술계가 직면한 과제는 명확하다. 어떻게 ‘전통적 심미성’을 유지하면서 ‘현대적 기술’과 융합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 이에 대한 가장 혁신적인 해답으로 나는 예술 해커톤(Arts Hackathon)의 활성화를 제안한다. 해커톤은 본래 '해킹(Hacking)'과 '마라톤(Marathon)'의 합성어로, 기획자, 개발자, 디자이너 등이 팀을 이뤄 제한된 시간 내에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협업 모델이다. 이것이 예술 산업에 도입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예술의 지속 가능성과 확장성을 담보할 핵심 엔진이기 때문이다. ◈ ‘낯선 결합’을 통한 창의적 파괴와 혁신 예술가들은 종종 자신만의 작업실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창작에 몰두한다. 하지만 현대 예술 산업의 난제들은 작가 개인의 역량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구조를 띠고 있다. 해커톤은 예술가, 엔지니어, 데이터 분석가, 마케터를 한자리에 강제로 모아놓는 ‘창의적 용광로’ 역할을 한다. 예술가는 기술자에게 영감을 주고, 기술자는 예술가에게 불가능했던 표현의 도구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무용가와 센서 기술 개발자가 만나 무용수의 움직임을 실시간 데이터 시각화로 구현하거나, 화가와 블록체인 전문가가 만나 작품의 이력을 투명하게 관리하는 솔루션을 도출하는 과정은 오직 해커톤이라는 밀도 높은 협업 환경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이종 교배’는 기존 예술계의 관성적인 사고를 깨뜨리는 창의적 파괴를 일으킨다. ◈ 예술의 비즈니스 모델(BM) 다각화와 생존 전략 예술 산업의 고질적인 문제는 ‘원화 판매’ 혹은 ‘공공 보조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취약한 수익 구조에 있다. 해커톤은 예술적 아이디어를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하는 ‘린 스타트업(Lean Startup)’의 장이 된다. 해커톤에 참여한 예술 전공자들은 자신의 창의성을 어떻게 서비스화(SaaS)할지, 어떻게 구독 경제 모델로 연결할지, 혹은 어떻게 예술 경험을 상품화할지 고민하게 된다. 24~48시간이라는 극한의 시간 제한은 완벽주의에 빠지기 쉬운 예술가들에게 ‘최소 기능 제품(MVP)’을 빠르게 시장에 내놓고 피드백을 받는 훈련을 시킨다. 이는 예술가가 단순한 창작자를 넘어 자신의 가치를 경영할 줄 아는 ‘아트프리너(Art-preneur)’로 거듭나게 하는 실전 훈련소와 같다. ◈ 관객 경험의 혁신, ‘보는 예술’에서 ‘참여하는 예술’로 현대 관객, 특히 MZ세대와 알파 세대는 일방적인 감상보다 상호작용과 참여를 원한다. 예술 해커톤은 관객의 경험(UX)을 극대화하는 기술적 솔루션을 찾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증강현실(AR)을 활용해 갤러리 밖에서도 도슨트 설명을 듣게 하거나, 관객의 뇌파를 측정해 실시간으로 변하는 미디어 아트를 선보이는 등의 시도는 모두 해커톤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새로운 향유 방식은 예술의 문턱을 낮추고, 잠재적 관객층을 넓히는 효과를 가져온다. 예술 산업이 대중과 멀어지지 않고 동시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해커톤을 통한 끊임없는 ‘경험의 프로토타이핑’이 수반되어야 한다. ◈ 예술 생태계의 민주화와 네트워킹의 확장 전통적인 예술계는 견고한 학벌이나 인맥, 특정 갤러리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해커톤은 오직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평가받는 능력 중심의 장이다. 이곳에서 무명의 청년 예술가는 거대 IT 기업의 개발자와 팀원이 되어 대등하게 토론하며, 자신의 철학을 기술 세계에 이식한다. 이러한 수평적 네트워킹은 예술 산업 내의 권력 구조를 해체하고, 더 많은 신진 인재가 산업 전면에 등장하게 하는 민주적 통로가 된다. 또한, 해커톤을 통해 형성된 인적 네트워크는 행사 종료 후에도 실제 스타트업 창업이나 공동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강력한 자산이 된다. ◈ 예술, 기술의 옷을 입고 미래로 나아가다 예술 해커톤은 단순히 앱을 만들거나 기계를 조립하는 행사가 아니다. 그것은 예술적 사유(Artistic Thinking)를 사회적 해결책(Social Solution)으로 치환하는 거대한 실험이다. 예술 산업이 박물관 속의 유물로 남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진화하기 위해서는, 해커톤이라는 역동적인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술가는 기술을 두려워하는 대신 기술을 ‘새로운 붓’으로 받아들여야 하며, 경영자는 예술적 영감을 ‘혁신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해커톤의 밤을 밝히는 예술가와 개발자들의 열정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예술이 자본과 기술의 하인이 아닌, 미래 산업의 진정한 설계자가 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예술 산업의 내일은 작업실이 아닌, 이 뜨거운 해커톤의 현장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예술경영 전문가의 제언: 만약 예술 전공 대학생들이 해커톤에 참여한다면, 자신의 기법적 우수함을 뽐내기보다 "나의 예술적 철학이 기술과 만났을 때 세상의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해커톤에서 우승하고, 나아가 성공적인 창업으로 이어지는 핵심 전략입니다. [붙임] 이 기사가 마음에 닿으셨다면, 주변의 작은 광고 한 번 눌러 주시면 힘이 됩니다.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더 나은 기사와 정직한 보도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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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교수의 칼럼] 경계를 허무는 혁신의 용광로, 예술 산업에 ‘해커톤(Hackathon)’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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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가슴을 데우는 이 한 편의 수필, 서교분 '붉은 흙먼지 속으로'
- 붉은 흙먼지 속으로 서교분/ 수필가, 시인 인생의 석양 무렵에 서니, 문득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 그리움의 갈래를 따라 2010년 3월의 기억을 불러내 본다. 당시 미얀마는 군사정권 아래 총선거를 앞둔 어수선한 정국이었으나, 우리는 종교의 벽을 허물고 오직 아이들에게 맑은 우물을 선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땅을 밟았다. 한국의 스님 대표들과 여불교 신도들 카토릭 자매들이 동행한, 그야말로 자비와 사랑이 하나 된 장엄한 여정이었다. 사실 나에게 이번 여정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평생을 자식 뒷바라지와 병석의 남편을 지키며 살아온 내게 여유로운 돈이란 단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미얀마 아이들이 흙탕물을 마시며 병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없는 액수일지 모르나, 내게는 뼈를 깍는 듯한 노력으로 한 푼 두 푼 모아온 생명과도 같은 돈이었다. 나는 본래 맛난 음식을 보거나 가지게 되면, 반드시 소중한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만 비로소 직성이 풀리는 조금은 별난 성격을 지녔다. 혼자 누리는 풍요보다 함께 나누는 소박한 밥상이 내 마음을 더 배불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성미가 먼 타국 땅 아이들의 목마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했다. 내 형펀의 넉넉함 때문이 아니라, 나눔을 향한 그 멈출 수 없는 지독한 성격이 나를 미얀마의 붉은 흙먼지 속으로 이끌었다. 나눌수록 내 마음의 빈터가 찰랑거리며 차오르는 그 신비로운 기쁨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성지로 향하는 길은 시작부터 육체적 고행의 연속이었다. 낡은 타이탄 트럭 뒤편에 나무판자를 걸쳐 만든 임시 의자에 일행이 줄지어 앉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를 때마다 몸은 속수무책으로 좌우로 쏠렸고, 갑자기 쏫아진 비에 낡은 비닐을 뒤집어쓰니 영락없는 짐짝 신세였다. 덜커덩거리는 자체에 몸을 맡긴 채,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지탱하며 그 험한 길을 견뎠다. 브레이크조차 예고 없이 멈쳐서 차가 뒤로 밀리는 아찔한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일행의 입에서는 낫은 탄식과 간절한 기도가 번갈아 흘러나왔다. 마침내 도착한 사찰에서 유리병 속 찬란한 사리들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의 요동은 인내의 평온함으로 바뀌었다. 유리병 속 사리들은 오랜 세월 인내한 성자의 눈물 같기도 하고,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영롱한 별빛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며, 내 인생의 고비마다 쏟았던 피눈물도 언젠가는 저토록 아름다운 보석으로 아물 수 있을지 나직히 물었다. 침묵 속에서 전해오는 성자의 가르침을 비우고 낮추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결한 평온이었다. ‘금란’이라는 나의 필명처럼, 인생의 고난을 단단하게 다져낸 뒤에야 비로소 은은한 향기를 낼 수 있다는 진리를 그 작은 유리병에서 다시금 깨달았다. 하산하는 길, 브레이크는 여전히 위태로웠고 길은 더욱 가팔라졌다. 긴장감이 감도는 트럭 안에서 나는 비닐우산을 펼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목청껏 가톨릭 성가 2번을 우렁차게 불렀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워 볼 때…” 빗줄기를 뚫고 퍼져 나가는 나의 노래는 미얀마의 산골짝에 메아리쳤다. “주님은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는 가사가 입술 끝을 떠날 때, 내 눈앞에는 비바람 치는 산길이 아니라 하느님이 빚으신 눈부신 대자연과 그 품안에서 살아가는 가난하고 선한 영혼들이 보였다. 스님들은 묵묵히 그 찬양을 들으며 우리가 무사히 내려가기를 함께 기도해주셨다. 성당과 사찰이 하나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 순간, 우리는 종교의 도그마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흐르는 선한 의지를 믿고 있었다. 비닐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마치 하늘이 보내는 박수소리처럼 경쾌했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느님이 내 작은 용기에 보내주시는 응원의 박수처럼 들려와, 굽어진 산길의 두려움마저 말끔히 씻어주었다. 우리가 찾아간 초등학교 아이들은 흙탕물을 마시며 위태로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부모의 평균 수명이 고작 50세라는 척박한 땅, 우리를 위해 고사리손을 흔들며 재롱잔치를 벌이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비록 옷은 남루했으나 맑은 눈방울로 웃어주던 그 몸짓은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고귀했다. 아이들의 발등에는 붉은 흙먼지가 가득했다. 신발도 없이 맨발로 뛰노는 그 작은 발들을 보며, 오래전 우리네 가난했던 시절이 겹쳐와 코끝이 찡해졌다. 여유 없는 형편에 모은 돈으로 만든 우물이 마침내 완공되어 맑은 물이 솟구칠 때,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맛난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던 그 별난 성격이, 이제는 목마른 아이들에게 생명수를 나누는 거대한 기쁨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밤샘 뜨개질을 하며 올렸던 그 간절한 기도들이, 이제는 이름 모를 미얀마 아이들의 목마름을 축이는 사랑으로 치유되고 있었다. 흙탕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맑은 우물이었지만, 사실 그 아이들이 내게 준 것은 메마른 내 영혼을 적시는 자비의 단비였다.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를 맞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함성 속에서, 나는 내가 살아온 88년의 모든 고단함이 한순간에 씻어 내려가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에서 휠체어를 밀며, 나 또한 그 의지에 기대어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남을 돕는 일이 곧 나를 돕는 길임을, 낮은 자세로 임할 때 비로소 내면이 더 단단해짐을 깨닫는 여정이었다. 돌아보면 삶이란 결국 나를 비워내고 그 빈자리를 타인의 행복으로 채워주는 과정이 아니든가. 타국의 아이들에게 우물을 파주며 정작 내 마음속 메말랐던 우물이 먼저 채워졌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비우면 비울수록 기쁨의 수위가 높아지는 역설적인 진리를, 미얀마의 흙먼지 속에서 다시금 배운 것이다.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아이들의 미소를 기억하며,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의 우물 물을 망에 거른다. 그 우물 물을 한 그릇이 세상의 목마른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나는 내 이름 ‘교분’처럼 죽는 날까지 사랑의 가르침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여유가 없어서 더 간절했고, 부족했기에 더 뜨거웠던 그 미얀마의 기억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훈장이 되어 영원히 흐를 것이다. 주 하느님이 지우신 모든 세계가 내 나눔을 통해 조금 더 향기로워질 수 있다면, 미수의 나이에도 여전히 우물을 파는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누군가에게 시원한 생명수를 건넬 수 있는 사람,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남길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흔적이 아니랴. ▼ 서교분 시인, 수필가 연세대 미래교육원 수필반 수료 국보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 국보문학 옥당문화상 수상 인천여자고등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경희대 행정대학원 석사 대구미래대학노인대학원 강사 역임 여의도성당 신앙수기 최우수상 여수기행문대상 수상 연세에세이회장 공로상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 저서 ‘그것은 고통이 아니고 은총이었습니다’(1989) ‘행복한 여자’(2009) ‘걸어온 길 걸어갈 길’(2014) ‘인연’(2020) ‘창가에 서서’(2023) ‘내 맘의 꽃’(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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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가슴을 데우는 이 한 편의 수필, 서교분 '붉은 흙먼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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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공간과 빛, 그리고 차이의 미학… 도자 설치가 전하는 새로운 감각
- [대한기자신문 이강문 기자] 도자와 빛이 빚어낸 소우주, 장상철 빛의 확산, Diffusion of Light 2026 초대전은 갤러리은에서 지난 11일부터 2월 22일까지 열린다. 리플랫에 나타난 김성호 미술 평론가의 ‘작가론(Critical Essay)’ 안내문은 이번 전시의 핵심 개념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장상철의 작업은 “반복되는 도자 구조와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차이를 통해 관람객은 단순한 공예품을 넘어 하나의 공간적 경험과 마주하게 된다.”고 밝혔다. 기자가 현장에서 만난 작품들은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각기 다른 배열과 간격, 그리고 빛의 반응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상을 만들어냈다. 특히 LED 조명과 유약 표면의 반사가 어우러지며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장면은 고정된 조형물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구조처럼 느껴졌다. 작품은 반복과 규칙 속에서도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변주를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질서와 우연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풀어낸 시도라는 평가다. 관람객들 역시 “가까이 볼수록 다른 표정이 보인다”는 반응을 보이며 작품 앞에 오래 머무르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전시는 도자를 ‘사용의 도구’에서 ‘공간을 구성하는 언어’로 확장시키며, 현대 설치미술이 지닌 감각적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 대한기자신문 현장 취재 결과, 작품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 사유의 시간을 제공하는 예술적 경험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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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취재] 공간과 빛, 그리고 차이의 미학… 도자 설치가 전하는 새로운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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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강단] 새로운 시작, 마침표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역사
- 여호수아 1장 1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위대한 시대의 종언과 마주하다 본문은 "모세가 죽은 후에"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가르고, 만나를 내리게 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직접 받은 불세출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 모세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대한 절벽이자 끝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순간이 찾아옵니다. 든든했던 후원자가 사라지거나, 익숙했던 환경이 바뀌고, 믿었던 계획이 무너질 때 우리는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마침표 뒤에 바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를 배치합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 준비된 사람, 여호수아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을 자로 여호수아를 지목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를 "모세의 수종자"라고 기록합니다. 그는 화려한 무대 위 주인공이 아니라, 긴 시간 동안 묵묵히 모세 곁에서 섬기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웅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성실함 속에서 훈련된 자를 부르십니다. 지금 당신이 처한 '수종자'와 같은 자리가 작아 보일지라도, 그곳은 하나님이 당신을 다음 세대의 주역으로 빚으시는 거룩한 연단장입니다. ◈ 소명은 계승됩니다 모세는 죽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죽지 않았습니다. 사역자는 바뀌어도 사역의 주인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시며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일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슬픔과 상실에 머물러 있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니 일어나라."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의 생사에 매이지 않고 영원히 흐릅니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담대히 발걸음을 내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문]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의 거대한 산 같았던 존재가 사라지고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두려움 속에 있을 때, 여호수아에게 찾아오셨던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모세의 죽음이라는 절망 앞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음을 믿습니다. 내 눈앞의 상황이 마침표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주님께서 써 내려가시는 새로운 장의 첫 글자임을 고백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화려한 자리를 탐하기보다, 여호수아처럼 묵묵히 주님의 뜻을 따르는 '수종자'의 마음을 품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일어나 가라"고 명하실 때 즉각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옵소서. 두려움을 용기로, 슬픔을 사명으로 바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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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강단] 새로운 시작, 마침표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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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이 한 편의 시, 송명화의 '아욱꽃'
- 아욱꽃 송명화/ 작가, 에세이문예 주간 지난 주말, 고향 마을 모녀 운동길 도단집 텃밭머리에서주섬주섬 한 보따리 생명을 얻었다 세상사 걱정 잊어 치매 꽃이 된 내 어머니와 동생들 바라지에 밭 모서리 아욱꽃으로 남은 파파 동네 처녀가 서로 눈부처로 떠오르던 아침 반나마 빈집인 시골 동네에 그래도 인사 없이 들어설 집 있더라 글썽이며 자물리던 꽃빛발이 곱더라 ▼송명화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수필), 수필집 『꽃은 소리 내어 웃지 않는다』외 5권, 김만중문학상, 신격호샤롯데문학상, 평사리문학대상 외. 전 한국본격수필비평가협회 회장, 전 사)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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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이 한 편의 시, 송명화의 '아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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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김봄구 교수의 열정 인생사, 수필 '영어로 끝내 설명할 수 없던 감정들'
- 영어로 끝내 설명할 수 없던 감정들 김봉구/ 수필가, 고려대 명예교수 유학 생활에서 처음 3개월은 신난다. 한국에서는 영어로 연습을 할 수 없다. 미국인이 없어서다. 현지 사람은 모두 미국인이다. 얼마나 좋은가. 하우 두유 두, 마이 네임 이스 서치, 아이 케임 프롬 코리아, 마이 메이져 이스 서치 서치라고 인사를 한다. 매일 초면이니 같은 말을 하면 된다. 반복할 수록 길어진다.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 5분을 넘게 된다. 이제 새로 만나는 사람은 없다. 만날 때마다 똑같이 어쩌구 저쩌구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새로운 말을 생각해 내야 한다. 1년이 지나면 영어 말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이 정도 기간이 되면 저절로 말할 것 같다. 천만이다. 하도 많은 실수를 해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지 않다. 그때부터 영어 대화를 기피한다. 2년이 되면 영어 말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 빨리 공부 끝내고 돌아가고 싶다. 3년이 되면 어떨까. 세상이 달라진다. 여학생들이 지나가면서 나누는 사적인 대화도 들린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는 속담이 맞다. 사람을 만나면 저절로 입이 열린다. 말을 듣게 되니 입에서 소리가 나온다. 우리가 쓰는 말은 영어로 옮기기 어려울 때가 많다. 언어는 문화와 정서를 따르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안녕이라는 단어는 처음 만날 때는 ‘하이’라고 하지만, 해어질 때는 ‘굿바이’가 된다. 정情이라는 말은 한국에만 있는 표현이다. 사랑 이상의 뜻을 담고 있다.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생기는 사랑과 의리 연민까지 포함하고 있다. 답답하다는 말은 의사소통이 안 될 때 느끼는 감정표현이다. 영어로 좌절하다는 표현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괜찮아요라는 표현은 영어로 오케이 노 워리 파인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영어로 내 사무실에 올 수 있겠느냐는 질문은 우리에게 왜 내 사무실에 오지 않느냐는 문책성 발언으로 들린다. ‘와이 돈츄’라는 물음표가 다른 언어로는 이런 뜻을 유발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좀 와줄 수 있느냐는 뜻이다. 죤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오스왈드의 총을 맞고 쓰러질 때 재클린 영부인이 그 자리에서 ‘오 노’ 했다고 우리 신문에 표기됐다. 감정을 뺀 글자만 표시한 것이다. ‘오우 노우’라고 표기해야 맞다. 발음도 그렇게 해야 한다.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초기에 카페테리아에서 저녁 메뉴로 스테이크가 나왔다. 한국 학생들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불과 15년밖에 안 되었던 시기라 육류에 대한 체질적인 ‘두드러기’ 때문이다. 스테이크에 소금과 후추 가루를 뿌리고 한두 점 먹는다. 그 대신 우유와 식빵 몇 장을 가져와서 버터를 발라 먹었다. 가난한 시절의 습관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주말이면 유학생 싱글들은 마땅히 갈 곳이 없다. 결혼한 학생 집에 초대받아 식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새로 온 학생들을 흔히 저녁 식사나, 아니면 공원 피크닉 파티에 초대했다. 한 번은 학생 두 명과 레이크에 낚시하러 갔다. 낚싯대 3개를 펼쳐놓고 있었다. 낚시하기에 좋은 오후였다. 낚싯대 세 개는 한 사람에게 허용된 숫자다. 그날은 잘 물려서 잡히는 데로 줄에 꿰어 두었다. 두 친구는 신나서 즐거운 표정이었다. 단속 경찰이 보트를 타고 들이닥쳤다. 피싱 퍼밑을 확인했다. 내가 면허증을 보여주면서 이 두 사람은 내 낚시를 도와주고 있다고 둘러댔다. 무면허 낚시는 범칙금이 많았다. 두 사람은 면허증 요구를 받지 않고 넘어갔다. 호수 주변을 파헤친 흔적을 점검했다. 나는 피싱베이트 샵에 들러 지렁이를 사왔다고 답했다. 물가에 둔 20마리 꾸러미를 들어 올리면서 치수를 꼼꼼히 점검했다. 잡은 배스의 크기를 문제 삼는다. 30cm 이상만 잡고, 그 이하 치수는 물속에 돌려보내야 한다. 허가된 치수 이하가 많다고 지적했다. 꾸러미에서 증거로 두 마리를 신문지에 포장해서 가져갔다. 지금처럼 핸드폰이 있어서 사진으로 증거를 남겼다면 나는 틀림 없이 가중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나중에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2주 후에 경찰관이 내 사무실에 왔다. 지금 법정에 출두해야 한다고 통고했다. 그동안 이 사건이 무마될 것이라고 믿고, 잊어버리고 있었다. 차량으로 세인트루이스 법정까지 동행을 요구했다. 고속도로를 40분간 달려서 법정에 도착했다. 법정에서 파인 45불을 선고받았다. 가계수표 45불을 써서 쉐리프 사무실에서 현금으로 바꾸어 납부했다. 두 사람에게 잡을 수 있는 배스의 크기를 알려주지 못했다. 경찰관이 현장에서 단속하는 것은 처음 겪었다. 후회스러운 일은 경고로 처리해 달라고 말하지 못한 점이다. 나중에 캘리포니아에 초빙교수로 갔을 때다. 아버지와 아내가 미국을 방문하여 둘째 딸과 네 명이 LA지역으로 여행을 갔다. 헐리우드를 구경한 후 비탈진 도로를 따라 다음 방문지를 가고 있었다. 도로가 묘하게 생긴 지점에서 중앙선을 넘고 다른 도로까지 진입하여 달렸다. 경찰 차량이 따라와서 내 차를 정지시켰다. 어처구니없었다. 정중히 말했다. 한국에서 가족이 와서 함께 여행 중인데 길도 서툴고 해서 대단히 죄송하다. 이번 일을 경고로 처리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하고 물었다. 경관이 탑승한 아버지를 보더니 그냥 가라고 했다. 200불의 벌금을 유예받은 셈이다. 이 사회에서는 법과와 규범을 지켜야 한다. 합리적인 행동과 예의 절차는 그들에게도 통용되는 도리이고 아량이다. 언어가 불편하더라도 만약의 경우에는 예의 절차를 갖추는 것을 권고하고 싶다. ▼김봉구 고려대 졸업, 미국 미주리대학교 자원경제학 박사,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 수필로 등단, 한국본격문학가협회 부회장, 고려대 학생처장, 고려대 노동대학원 원장 역임, 수필집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발간, 제1회 에세이문예사 찾아가는 북토크콘서트 대상작가, 제1회 에세이북콘서트어워드, 에세이문예 작가상 수상, 현재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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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김봄구 교수의 열정 인생사, 수필 '영어로 끝내 설명할 수 없던 감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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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이 한 편의 시, 조옥임의 '시간을 말다'
- 시간을 말다 조옥임/ 시인, 수필가 끝이 갈라진 시간이 싹둑, 바닥으로 떨어진다 흰 머리는 염색약 속에서 뿌리를 잠시 숨기고 자를 것 없는 사람도 잠깐 들러 볕에 데워진 하루를 의자에 앉힌다 롯드를 말아 올리는 손 하루를 같은 간격으로 묶고 손톱 밑에는 지워지지 않는 검은 얼룩 싸인볼이 돌아가고 거울 속 얼굴들이 형광등 쪽으로 기울 때 말은 줄고 숨이 가벼워진다 머리 위 시간이 조금 덜고 엉킨 생각을 빗질한 하루를 매듭을 풀고 낮과 같은 밤 불을 끄지 않는 그녀의 얼굴 동네 끝 달아나는 빛을 붙들고 있는 선 헤어크리닉 ▼조옥임 경남 함안 출생, 2022년 계간 ≪에세이문예≫겨울호 수필 등단, 2025년 계간 ≪에세이문예≫ 가을호 시 등단,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한국수필 회원,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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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이 한 편의 시, 조옥임의 '시간을 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