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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기자신문] 검이불루 화이불치, 사회 지도층의 품격은 어디에서 증명되는가
    [대한기자신문 이창호 칼럼니스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이 고사성어가 법정에서 인용된 장면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개인의 생활 태도를 넘어, 오늘날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기준과 공적 책임을 다시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사회 지도층은 법적 지위나 직함 이전에 영향력을 가진 존재다. 정치·경제·문화·언론 등 각 영역에서 이들의 언행과 소비, 관계 맺기 방식은 사회 전반의 규범을 형성한다. 문제는 이 영향력이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는 행동 하나가 사회적 신호로 작동하고, 때로는 불공정과 특권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지도층의 삶은 언제나 공적 해석의 대상이 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이 지점에서 오래된 기준이자 여전히 유효한 잣대다. 검소함은 미덕을 과시하기 위한 연출이 아니며, 화려함은 권력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지도층의 품격은 소비의 규모가 아니라 태도의 절제에서 드러난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인식하고 있는가, 영향력을 사적 욕망의 방패로 사용하지는 않았는가가 핵심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지도층의 사적 영역에 관대한 편이었다.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말은 종종 모든 비판을 차단하는 만능 방패로 사용됐다. 그러나 윤리는 합법의 최소 선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법이 허용한다고 해서 사회적 신뢰까지 자동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도층일수록 법의 경계선에서 스스로 한 발 물러서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번 고사성어가 소환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특정 개인을 겨냥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던지는 경고에 가깝다. 지도층의 사적 행위가 반복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회는 건강하다고 보기 어렵다. 불신이 쌓이면 제도는 흔들리고, 공동체의 규범은 약화된다. 신뢰는 가장 천천히 쌓이고, 가장 빠르게 무너진다.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품위는 특권이 아니라 의무다. 많은 것을 누릴수록 더 많은 절제가 필요하다. 영향력이 클수록 사적인 선택은 더 명확한 윤리적 기준 위에 놓여야 한다. 이것이 민주사회에서 지도층이 정당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그래서 지금의 한국 사회에 유효한 질문이다. 우리는 사회를 이끄는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화려함을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그 화려함이 공정 위에 서 있는지를 묻고 있는가. 지도층 스스로는 자신의 삶이 사회적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가. 작금, 법정에서 울려 퍼진 한 문장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검소하되 초라하지 않고, 화려하되 넘치지 않는 삶. 이는 개인의 도덕을 넘어 사회 지도층이 공동체와 맺는 약속이다. 그 약속이 말이 아닌 실천으로 증명될 때, 사회의 신뢰는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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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9
  • [일요 칼럼] '아는 길' 앞에 멈춰 서는 용기, 경청이 만드는 최적의 해(解)
    [대한기자신문 이창호 칼럼니스트]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선조들의 격언은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칫 고리타분한 잔소리로 치부되기 일쑤다.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목적지에 도달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손안에 쥔 채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며 사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 행위’는 불필요한 지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이 진부한 격언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확신이 집착으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가장 위험한 길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 ‘내가 최고’라는 무의식적 오만 경계해야! 인생을 살다 보면 스스로 ‘틀림없다’고 자부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수년간 쌓아온 경험치와 성공의 기억이 결합하면, 타인의 조언은 소음으로 전락하고 자신의 판단은 신조(信條)가 된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것은 밖으로 드러난 독단보다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나만이 옳다’는 생각이다. 자기 확신은 추진력의 원동력이 되지만, 성찰 없는 확신은 눈을 가리는 가리개가 된다. 나보다 더 나은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성장이 멈춘 지점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닿지 못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도처에 존재하며, 그들의 시선은 내가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비춘다. ■ 신중함의 완성, 마지막까지 문을 열어두는 자세 진정으로 신중한 사람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들이 보여주는 신중함의 본질은 ‘결정의 유보’가 아니라 ‘최상의 의견 수렴’에 있다. 최종적인 결정권이 나에게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마침표를 찍기 직전까지 타인의 의견을 묻는 정성은 결코 유약함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강한 자존감의 발로다. ▪︎다양성의 수용 내 생각보다 더 나은 대안이 나왔을 때, 그것을 즉각 수용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전문성의 존중 각 분야 전문가들의 통찰을 내 결정의 거름으로 삼는 지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최적의 결과 도출 단순히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리더십의 본질이다. 경청은 최고의 효율이자 품격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에게 묻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길을 되돌아오는 비용에 비하면 이는 가장 경제적인 투자다. 마지막 순간까지 '더 좋은 생각은 없을까?'라고 자문하며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는 '결과의 완성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그 결정을 함께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얻는 길이다. 신중함은 단순히 조심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허함이며, 타인의 지혜를 빌려 내 부족함을 채우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다. 아는 길을 물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 것을 넘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더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과'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 지금 당신이 걷고 있는 그 익숙한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서서 곁을 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한 해(解:깨닫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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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5
  • [대한기자신문] 이창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을 다녀왔다.
    [대한기자신문]=『이순신 리더십』의 저자인 이창호는 이 전시를 단순한 역사 관람이 아니라, 오늘의 사회가 다시 묻고 답해야 할 리더십의 본질을 성찰하는 자리로 받아들였다. 박물관의 정제된 공간 속에서 이순신은 위대한 영웅의 초상으로만 서 있지 않았다. 그는 불확실성과 분열의 시대를 건너온 한 인간이자,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원칙을 지켜낸 지도자로 호흡하고 있었다. 전시는 익숙한 전공(戰功)의 서사보다, 기록과 생활의 결을 통해 이순신을 다시 불러낸다. 난중일기의 문장들은 과장 없는 언어로 고통과 책임의 무게를 전하고, 전술과 장비의 디테일은 승리의 조건이 기적이 아니라 준비와 절제였음을 증명한다. 이창호저자는 이 지점에서 리더십의 핵심을 읽는다. 위기는 우연히 극복되지 않으며, 신뢰는 말이 아니라 일상의 축적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우리들의’라는 복수형이 던지는 질문이다. 이순신은 과거의 인물이지만, 오늘의 시민과 조직, 국가가 함께 소환해야 할 가치의 총합으로 제시된다. 권한이 아니라 책임으로, 성과가 아니라 과정으로 리더를 평가하라는 메시지는 전시 전반에 잔잔히 흐른다. 이창호저자가 오래 천착해 온 ‘원칙의 리더십’은 이 전시에서 생생한 역사적 근거를 얻는다. 흔들리는 정국 속에서도 법과 질서를 버리지 않았던 선택, 공을 독점하지 않고 실패를 홀로 감내했던 태도는 지금도 유효하다. 전시는 또한 이순신을 신화화하지 않는다. 좌절과 오판의 흔적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리더의 인간적 한계를 인정하는 성숙한 시선을 제시한다. 그 한계 위에서 더 단단해진 절제와 배려가 공동체를 지켜냈다는 서사는, 경쟁과 속도가 미덕이 된 오늘에 묵직한 반문을 던진다. 빠른 결정이 아닌 올바른 판단, 강한 통제가 아닌 공정한 신뢰가 위기의 파고를 넘는 힘이라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이 전시는 과거를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늘의 언어로 번역된 이순신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 것인가, 누구를 위해 책임질 것인가. 이창호의 발걸음이 오래 머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순신은 박물관 유리 진열장 속에 있지 않았다. 우리의 일상과 제도, 그리고 리더의 태도 속에서 다시 살아나야 할 현재진행형의 이름이었다. ‘우리들의 이순신’은 그래서 조용하지만 강하다. 영웅의 찬가가 아니라 시민의 교과서로서, 이 전시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되새겨야 할 리더십의 좌표를 또렷이 찍는다. 역사는 기억될 때 힘을 얻고, 리더십은 실천될 때 증명된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난 이순신은 그 오래된 진실을 변함없이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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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9
  • [대한기자신문] 권대근 칼럼 '우리가 기후다'
    우리가 기후다 권대근/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지구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으며 지구가 파괴되는 현상이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고, 숲은 우리를 불태우고, 가뭄은 우리를 굶주리게 하고, 강은 우리를 익사시키고, 기업은 우리를 질식시키니, 이제 기후변화를 더 이상 무시해서는 안 된다. 스웨덴의 청소년환경운동가 툰베리는 탁월한 연설을 통해서 미래세대를 위협하는 기후위기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노벨평화상 후보까지 오른 것을 보면, 그녀의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전 대통령 트럼프가 기후협약의 탈퇴를 선언하면서 거의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툰베리가 뜻밖의 신선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작다고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건 아니라는 걸 몸소 실천해 보였다. 우리 문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하는 자식들 앞에서, 어른들이 미래를 훔치고 있다고 툰베리는 목소리를 높이며, ‘우리가 미래를 요구하는 것이 무리한 것인가요’ 라며 어른들과 권력자들에게 되묻기도 한다. 그녀는 2018년 8월 20일 스웨덴 의회건물 앞에서 ‘기후를 위한 등교거부’라는 팻말을 들고 시위에 나섬으로써 미래의 목소리를 내는 강렬한 이미지로 전 세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초등학교 4학년때 선생님으로부터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듣고 자신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미래를 위한 금요일 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어 2015년 파리기후협약을 성사시켜내는 촉매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기후는 바뀌길 원하지 않는다며 사람들의 생활방식이 바뀌어야 함을 설파했다. 그녀는 경제성장 같은 인기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기 없는 것을 두려워한다면서 ‘기후정의’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위기를 위기라고 인정하지 않고서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며 진정한 힘은 사람들에게 있다고 언명했다. 기후변화는 세대간의 문제로 부모가 회피해서 생긴 문제를 자식에게 떠맡게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쳐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녀는 또 기후와 생태의 위기에서 권력자들은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을 비판하며, 유엔 연설을 하러 가면서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요트를 타고 갔다.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녀는 여론이 권력자들을 압박하면 대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면 이 대전환의 시대, 미증유의 팬데믹 시대, 지구가 중병을 앓고 재앙을 토해내고 있는 이 때, 우리 문학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지성인은 말로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가. 문학인은 인류의 교사가 되어야 하리라.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필봉을 휘둘러야 되고, 문학을 위한 물음은 공동체를 향한 물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한 사회의 높이를 가늠할 때는 그 사회에서 문화나 철학이나 예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혹은 어떤 대접을 받는지를 보기도 한다. 이것들의 가치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회는 그 사회 구성원들의 시선이 이미 이것들이 제공하는 높이를 수용할 정도에 도달해 있다고 최진석 교수는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라는 책에서 말한 바 있다.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에서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시대적 조건과 국내의 정치지형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문화를 핵심적 가치로 설정한 점은 가슴에 깊이 새길 만한 내용이다. 경제력이나 국방력도 문화력에서 나온다. 생명, 생태, 자유, 인권, 평화와 같은 덕목이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가 바로 문화적이고 예술적이며 철학적인 사회다. 지금까지는 생태적 상상력이나 합리성을 바탕으로 지구를 살리는 운동에 매진했다면, 이제는 좀더 구체적인 개념으로 기후정의를 추구해야 할 것 같다. 이를테면, ‘우리가 날씨다’라는 구호다. 이제 ‘날씨’ ‘기후’는 위에 언급된 다섯 가지 덕목에 앞서는 키워드로, 대전환 시대의 아이콘으로 부각했다. 언어는 곧 우리의 무기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언어와 의식으로 무장해야 하리라. 미국 템플대에서 공공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있는 제이슨 델 간디오 교수는 '혁명은 가능하며,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 저술가이자 활동가이다. 그는 2000년 봄 우연히 저녁 뉴스를 보다가 워싱턴에서 사람들이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에 항의하는 장면에 붙들렸다. 그 장면을 보고 그는 세상을 더 좋게 바꾸려면 세계 속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 뒤부터 활동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소극적인 참여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선택했다. 우리 문인도 이제 펜을 들고, 행동을 때가 된 것 같다. 필자 역시 ‘Change your word, change your world.'를 외치는 사람이다. 대학원대학교에서 '문학언어의 힘'을 예비 석박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문학언어생태학자로서 '언어는 파워다'라는 생각으로 수사나 언어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채득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야 하며, 그것이 가능하려면 활동가와 조직가의 ’수사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경운동가 툰베리가 성공한 것은 그녀의 의지와 진정성도 중요하게 작동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공 요인은 그녀의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언술과 수사학이었다고 본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저마다 벗어나고 싶은 삶의 굴레가 있다. 누구나 밟고 싶은 생의 유토피아가 있다. 과연 그 바람을 이루는 신의 한 수는 무엇일까? 이제 우리 작가들은 답해야 하리라. 이 지점을 구한말에서 한국으로 넘어가는 시기로 보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단발령’에 얼마나 통탄했던가. 인간은 문명사회 이래 공동체사회, 즉 휴면 사회를 구축해왔다. 그러나 백신의 보급에도 불구하고, 팬데믹의 영향으로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넘어 ‘위드-코로나 시대’가 온다고 생각하니 두렵기만 하다. AI의 발전으로 로봇시대의 도래도 점쳐진다. 가상현실에 접속해서 노는 사람들, 로봇과 노는 사람, 심지어는 가족에 대한 개념이 바뀌고 로봇과 결혼도 하고, 로봇과 운우지정도 나누는 시대를 상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인구는 줄고, 비혼주의가 늘면서 인간의 자리에 로봇과 복제인간이 설지도 모른다. 영국의 작가 메리 셀리가 쓴 공상과학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처럼 실수로 만들어진 ‘괴물’ 같은 복제인간들이 나와 거리를 활보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권대근 88년 《동양문학》 등단 후, 〈경북신문〉신춘문예 평론, 미주〈중앙일보〉신춘문예 수필 신춘문예 당선, 사)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 부산수필문학상, 부산펜문학상 등 수상, 평론집 『수필은 사기다』 외 28권, 현)대신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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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02
  • [대한기자신문] 탄소중립 시대의 실현, 대한민국부터...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리더십과 실천 전략[영상]
    [대한기자신문 이창호 탄소중립문화대사]=지구는 지금 ‘기후 비상사태’에 직면해 있다. 세계기상기구(WMO)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지구 평균기온은 산업화 이전 대비 1.2°C 상승했으며, 2030년대 중반에는 파리협정의 한계치인 1.5°C를 초과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폭염, 산불, 홍수와 같은 기후재난은 더 이상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글로벌 공동 대응으로, 2050 탄소중립(Net-Zero) 목표가 국제적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대한민국 역시 2020년 2050 탄소중립 선언을 공식화하고,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2018년 대비 40% 감축으로 상향 조정하였다. 그러나 선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탄소중립은 단순한 환경 의제를 넘어 에너지, 산업, 경제구조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 대한민국의 과제와 기회 ▸에너지 전환의 구조적 문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온실가스 배출국이며, 전체 에너지의 70% 이상을 여전히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다. 특히 석탄발전 비중은 OECD 평균을 상회하고 있어 감축 속도가 더딘 실정이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비중을 2030년까지 21.6%로 확대하고,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차세대 원전을 병행 확대할 방침이지만, 입지 갈등과 전력계통의 한계는 여전하다. ▸산업 전환의 병목 에너지 다소비 업종인 철강, 석유화학, 반도체 등은 국내 탄소배출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 산업의 탈탄소화를 위해 수소환원제철, CCUS(탄소포집·활용·저장) 등 기술혁신이 시급하다. 대기업은 RE100 참여를 확대하고 있으나, 중소·중견기업의 전환을 위한 재정·기술적 지원은 부족하다. ▸사회적 합의의 취약성 탄소중립은 경제 전반의 조정과 사회적 비용을 수반하는 과제다. 그러나 탄소세 도입, 그린프리미엄 정착, 생활 소비 패턴 전환 등은 아직 사회적 공론화 단계에 머물고 있다. 정책 수용성을 높이기 위한 시민 참여와 교육 강화가 절실하다. ◆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5대 전략 기후 위기 대응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습니다.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길목에서, 우리는 에너지 시스템의 다변화와 혁신을 통해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해상풍력과 태양광이 만드는 청정에너지는 스마트그리드와의 연계를 통해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되고, 원자력과 수소는 서로의 한계를 보완하며 안정적인 전력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린수소 인프라 역시 점차 확대되며, 수요 중심의 체계적인 확장이 진행 중이다. 이러한 변화는 에너지에만 머무르지 않다. 산업 구조 전반이 녹색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탄소 가격의 기능을 강화한 배출권 거래제는 기업들의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고 있고, ESG 경영이 확산되며 공공조달 영역에서도 ‘녹색’이 표준이 되고 있다. 중소기업 또한 이 흐름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기술개발과 전환 펀드를 통해 실질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 도시와 교통체계도 변화하고 있다. 걷고 생활하며 일하는 공간이 가까운 ‘15분 도시’가 확대되고, 전기차와 수소차는 일상에서 점점 더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대중교통도 친환경 철도와 버스를 중심으로 재정비되며, 이동 그 자체가 지구를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입니다. 탄소포인트제나 녹색제품 인증제가 더욱 확대되고, 체계적인 기후교육과 지역 단위 실천 공동체의 활성화는 생활 속에서 탄소 감축을 실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고 있다. 저탄소 식단과 재사용 문화를 비롯한 작은 습관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어 간다. 국제사회와의 협력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G20과 APEC 등 다자 협력체를 통한 기술외교, 개발도상국에 대한 녹색 ODA 지원, 그리고 아시아 탄소중립 파트너십 구축을 통해 우리는 기술과 공공외교 양면에서 주도권을 확보해가고 있다.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이 여정에, 대한민국은 기술과 사람, 그리고 신뢰로 응답하고 있다. 사진: 탄소중립모사AI이미지/대한기자신문 ◆ 탄소중립은 새로운 기회다 탄소중립은 미래 세대를 위한 윤리적 책무이자, 우리 경제의 새로운 성장 모멘텀이다. 정부는 법·제도의 로드맵과 재정적 뒷받침을 명확히 하고, 기업은 지속가능경영을 통해 기술혁신을 선도해야 한다. 시민은 소비와 생활의 전환을 통해 탄소중립 실천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 2025년 「기후위기 대응법」 시행은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산업화 성공 경험을 디딤돌 삼아, 대한민국이 저탄소 사회로 도약할 수 있도록 모두가 협력해야 한다. 탄소중립은 부담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미래를 여는 전환의 기회다. 지금이 바로, 행동할 시간이다. 이창호 칼럼니스트 소개 탄소중립문화대사, 『생태문명』 등 저서외 50여권. ▼자발적, 원고료로 응원해 주세요! ▪︎예금주: 대한기자신문 ▪︎계좌: 우체국 110-005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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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22
  • [대한기자신문] 대한민국의 미래, 과학 기술에 달려 있다
    [대한기자신문 이창호 대기자] 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이 오늘날 세계 경제의 주역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핵심 배경은 바로 과학 기술이었다. 반도체, 바이오, 인공지능, 우주기술 등 전략 산업 분야에서 이루어진 기술 혁신은 경제 성장의 견인차였고, 외환 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굴곡 속에서도 우리 산업을 지탱해온 힘이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지금의 경쟁력을 지키지 못하면, 기술 종속과 산업 붕괴의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 반도체 패권 경쟁 속 한국의 기회와 위기 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해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지만, 미국, 중국, 일본 등의 본격적인 반도체 패권 경쟁은 한국에 위기이자 기회다. 특히 AI 반도체와 양자컴퓨팅, 고성능 컴퓨팅(HPC) 분야는 아직 판이 형성되는 중이다. 지금 이 분야에서 선점하지 못하면,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라는 자부심은 과거의 유산에 그칠 수밖에 없다. 2023년 삼성전자의 3나노 양산 성공, KIST의 양자암호통신 개발, 네이버의 ‘하이퍼클로바’ 프로젝트는 우리가 여전히 경쟁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민관이 손잡고 장기적인 R&D 투자와 인재 양성에 나서지 않는다면, ‘초격차’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 ■ 바이오헬스, 성장 가능성은 크지만 투자 격차 심각 코로나19 팬데믹은 바이오헬스 산업의 중요성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우리나라 역시 mRNA 기술 도입과 자체 백신 개발을 통해 빠른 성장을 이뤘지만, 기초 연구 인프라와 투자 규모 면에서 미국, 유럽과는 비교가 어렵다. 미국이 2024년 바이오 R&D 예산으로 500억 달러(약 670조 원)를 편성한 반면, 한국은 고작 5조 원 수준이다. 이대로는 글로벌 바이오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정부는 민간 투자를 적극 유도하고, 규제를 혁신해 신약 개발 생태계를 유연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서울대, KAIST, 연세대 등 주요 대학과 병원, 연구소가 참여하는 ‘한국형 바이오클러스터’ 조성이 시급하다. ■ 우주 시대, 민간과 정부의 공조가 필요 ‘누리호’ 발사 성공은 한국 우주산업의 가능성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한국형 발사체의 상업적 성공과 함께, 2030년 달 탐사, 2045년 화성 탐사를 내건 항공우주연구원의 청사진은 다소 낯설지만 분명한 비전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미국의 스페이스X, 중국의 창정 로켓과 비교할 때 기술력과 투자 규모 모두 열세다. 이제는 정부 주도의 개발을 넘어 민간 우주기업 육성에 본격 나서야 할 때다. 스타트업과 중소기업이 우주 위성, 발사체, 항공 데이터 등 다양한 분야에 진입할 수 있도록 R&D 자금과 규제 완화를 병행해야 한다. ‘한국판 스페이스X’가 가능하도록 지원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 ■ 인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학 기술 인재의 유출과 국내 연구 생태계의 고갈이다. 해외로 진출한 박사급 인재가 3만 명을 넘었고, 국내에 남은 인재마저 불안정한 고용 구조와 낮은 처우, 연구 환경 악화로 인해 창의력을 펼칠 여지가 줄고 있다.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 달라.” 이재명정부는 이 요청을 ‘지원’이 아닌 ‘국가 생존의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 AI, 양자과학, 우주공학 등 미래 기술 분야에서 해외 석학과 청년 인재를 동시에 유치하고 정착시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 국가 전략으로서의 과학 기술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이 과학 기술을 국가 전략의 최우선 순위에 올려야 할 때다. 단순한 R&D 지원이나 일회성 성과가 아닌, 기술 생태계를 중심에 둔 장기 전략과 거버넌스가 요구된다. 규제 완화, 예산 확대, 산학 협력, 인재 유치와 같은 정책 수단을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기술의 격차는 곧 국력의 격차다. 대한민국이 지속 가능한 번영을 꿈꾼다면, 과학 기술을 가장 강력한 성장 동력으로 삼는 선택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자발적, 원고료로 응원해 주세요! *예금주 : 대한기자신문 계좌 : 우체국 110-005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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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
    2025-07-13

실시간 교육 기사

  • [대한기자신문] 행복, 어디에 있을까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행복을 묻는 질문은 오래되었지만, 요즘처럼 자주 던져지는 시대도 드물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고, 기술은 편리해졌지만 삶은 더 바빠졌다. 우리는 더 많이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자주 공허함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묻는다. 행복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많은 이들이 행복을 조건으로 이해한다. 일정한 소득, 안정된 직업, 무탈한 가정, 사회적 인정. 이런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스럽게 행복해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조건을 충족해도 행복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목표를 이루는 순간의 기쁨은 잠깐이고, 곧 더 높은 기준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행복이 자꾸 뒤로 미뤄지는 이유다. 문제는 행복을 미래형으로 설정하는 데 있다. 우리는 지금의 삶을 ‘과정’으로 여기고, 행복은 언젠가 도착할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 사고방식 속에서 현재는 늘 부족하다. 더 나아져야 하고, 더 견뎌야 하며, 더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 된다. 그렇게 오늘은 내일을 위한 희생물이 되고, 삶은 끊임없이 유예된다. 하지만 행복은 그렇게 도착하는 목적지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의 감정과 상황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태에 가깝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누군가는 불만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무사히 지나간 하루로 받아들인다. 차이는 조건이 아니라 인식에 있다. 행복은 외부에서 주어지기보다, 현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현재에 머무는 연습을 거의 하지 않는다. 과거의 선택을 곱씹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는 데 익숙하다. 이 사이에서 현재는 늘 사라진다. 불안은 미래에서 오고, 후회는 과거에서 오지만, 정작 우리가 살아내는 시간은 언제나 지금이다. 행복이 지금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행복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특별한 사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 큰 감정의 파동이 없는 상태는 흔히 ‘평범함’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삶을 실제로 지탱하는 것은 이런 평범한 시간들이다. 무사함, 안정감, 예측 가능성은 눈에 띄지 않지만 가장 지속적인 행복의 기반이다. 또 하나 놓치기 쉬운 사실은, 행복이 늘 긍정적인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불안과 슬픔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런 감정이 삶 전체를 잠식하지 않도록 중심을 유지하는 일이다. 현재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감정에 끌려가지 않는다. 이것은 행복을 유지하는 현실적인 힘이다. 행복을 찾기 위해 삶을 크게 바꿀 필요는 없다. 속도를 조금 늦추고, 비교를 줄이며, 지금의 상태를 완전히 실패로 규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은 달라진다. 더 나은 삶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더 나은 삶을 위해 지금의 삶을 부정하지 말자는 제안이다. 결국 “행복,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은 이렇게 귀결된다. 우리는 행복을 너무 멀리 두고 있지 않은가. 행복은 완벽한 조건 뒤에 숨어 있는 보상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내는 방식 속에 있다. 지금의 삶을 임시가 아닌 본편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행복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행복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 ☞ 위 내용에 관해 조금 더 관심 있는 분은 필자가 집필한 “행복, 어디에 있을까” 에세이를 교보문고 등을 통해 e-Book으로 만나보실 수 있음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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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9
  • [기획] "AI가 못 읽는 인간의 무의식, '도형'으로 풀어낸다"
    [대한기자신문 이강문 기자]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업무를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역설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다루는 영역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도형을 통해 인간의 기질과 심리 상태를 분석하는 '도형심리상담'이 새로운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남서울대학교 가족기관인 남서울평생교육원은 오는 3월 10일부터 '도형심리상담사 자격과정'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이번 과정은 단순한 자격증 취득을 넘어 현장에 즉시 투입 가능한 실전형 인재를 육성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 AI 시대, 왜 '도형심리'인가? 디지털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인간은 고립감과 정서적 허기를 느끼기 쉽다. 이번 강의를 진행하는 박동성 강사(경기여성리더클럽 총회장)는 도형심리가 AI 시대에 꼭 필요한 이유로 '무의식의 시각화'를 꼽았다. 동그라미(○), 세모(△), 네모(□), 에스(S)라는 네 가지 기본 도형을 통해 내담자의 잠재된 성향과 현재의 심리적 갈등을 단시간에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 강사는 "AI는 데이터를 분석하지만, 도형은 인간의 깊은 무의식을 투영한다"며 본 과정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 김한준 교수 "자격증 개수보다 중요한 건 '실행력'" 남서울대학교 교양대학 김한준 교수는 이번 과정의 핵심 가치를 '현장성'에 두었다. 김 교수는 "자격증 개수보다 중요한 것은 실제 상담 현장에서 발휘되는 실행력"이라며, "수료 즉시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실전형 인재'를 만드는 것이 남서울평생교육원이 추구하는 교육의 지향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본 과정은 미술치료와 색채심리를 연계한 통합형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상담 기법의 확장을 원하는 현직 상담사부터 자녀 교육에 관심 있는 학부모까지 폭넓은 층을 대상으로 한다. ■ 평생교육의 가치... "한 번 입교로 평생 공부" 평생교육 시대를 맞아 교육생들을 위한 사후 관리 혜택도 파격적이다. 남서울평생교육원 측은 한 번의 입교로 동일 강좌를 평생 무료 수강할 수 있는 '평생교육 지원' 제도를 운영한다. 또한 우수 수료자에게는 보조교수 활동 기회를 부여하고, 강사 자격 이수 후에는 직접 강의를 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해 준다. 이번 과정은 3월 10일부터 4월 9일까지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에 진행되며, 접수 기간은 오는 3월 6일까지 선착순 20명 마감이다. 교육비는 35만 원(자격증료 별도)이며, 신청은 남서울평생교육원 홈페이지나 전화 문의를 통해 가능하다.[문의: 남서울평생교육원 02-922-4177, 김한준 교수 010-7731-7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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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
    2026-02-12
  • [대한기자신문] 거꾸로 보는 세상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우리는 흔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다.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으로 축적한 판단이 곧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멈춰 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사실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 오랜 시간 학습된 해석의 결과일 때가 많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일정한 방향의 삶을 배운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성장은 위로 향하며, 속도는 경쟁력이고, 더 많은 선택지는 곧 더 큰 안전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인식은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벗어난 시도는 비효율적이거나 위험한 선택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익숙한 해석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치열하게 올라온 자리에서 예상하지 못한 공허를 느끼기도 하고, 남들보다 늦게 걷는 길에서 오히려 안정과 만족을 발견하기도 한다. 옳다고 믿었던 판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장면을 마주할 때도 있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질문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혹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거꾸로 본다’는 것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거나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해의 범위를 넓히는 인식의 전환에 가깝다. 같은 풍경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 보이지 않던 의미가 드러나듯, 사고의 방향을 바꾸는 일은 우리가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실제로 많은 변화는 이런 관점의 전환에서 시작되었다. 실패를 끝이 아니라 학습으로 바라보는 태도, 경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시선, 속도를 늦추는 것이 뒤처짐이 아니라 균형을 찾는 선택이라는 깨달음이 그렇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거창한 혁신이 아니라, 익숙함을 잠시 내려놓는 작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현대 사회는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을 강조하지만, 때로는 질문을 바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기준을 잠시 뒤집어 보는 순간, 삶의 방향뿐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선택과 속도를 인정하는 사회는 바로 이런 시선의 확장에서 가능해진다. 결국 ‘거꾸로 보는 세상’이란 세상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익숙함 속에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답을 배우며 살아왔다. 이제는 질문의 방향을 바꿀 때다. 때로는 세상을 바로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잠시 거꾸로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위 내용에 관해 조금 더 관심있는 분은 필자가 집필한 “거꾸로 보는 세상”에세이를 e-Book으로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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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일반
    2026-02-11
  • [대한기자신문=김민정의 온숨] 평가보다 그다음이 중요한 이유
    [대한기자신문 김민정 코치] 연말연시가 되면 조직 안의 공기는 묘하게 무거워진다. 인사평가 결과와 성과 등급이 발표되는 시기. 많은 직장인은 설렘보다 긴장감 속에 선다.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잘하고 싶은 열망보다 앞서는 건, 그저 탈 없이 넘어가고 싶다는 바람이다. 우리는 평가를 너무 쉽게 ‘나’와 동일시한다. 결과가 좋으면 잠시 안도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화살을 스스로에게 돌린다. 평가표의 숫자와 몇 줄의 논평이 나의 태도와 능력, 심지어 잠재력까지 규정해 버리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짚어보자. 조직의 평가는 태생적으로 당신의 전부를 담을 수 없다. 평가는 ‘과거의 특정 시점’에 ‘제한된 기준’으로 관찰된 결과일 뿐이다. 지난 1년 혹은 분기의 일을 조직이 정해놓은 지표로 정리한 기록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평가가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능력이 고정된 것도 아니고, 커리어 가능성이 닫힌 것도 아니다. 그 안에는 성과의 맥락과 환경적 한계가 담겨 있을 뿐, 당신의 커리어 전체를 판결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같은 평가표를 받아 들고도 이후의 삶이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누군가는 결과를 자신과 겹쳐 보며 주저앉고, 누군가는 그 결과를 하나의 데이터로 받아들인다. 차이는 능력의 크기가 아니라 해석의 방향이다. 평가를 감정으로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 선택을 위한 정보로 다룰 것인가의 차이다. 평가 앞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태도는 두 가지다. 첫째는 ‘과도한 자기 비난’이다. 부족하다는 결론에 매몰되어 그간의 노력을 스스로 지워버린다. 둘째는 ‘방어적 냉소’다. 평가를 애써 무시하거나 조직의 기준을 탓하며 성장의 기회를 닫아버린다. 양상은 다르지만 결론은 같다. 다음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는다는 점이다. 평가를 주도적으로 다루는 사람은 숫자나 등급에 머물지 않고 그 맥락을 읽는다. 내가 집중했던 방향이 조직의 우선순위와 일치했는지, 수치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요구됐던 역할은 무엇인지, 지금 위치에서 조정해야 할 지점은 어디인지 차분히 정리한다. 이는 조직에 순응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커리어를 독립적으로 경영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전략이다. 평가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여야 한다. 조직은 결과를 통보하지만, 그 이후의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는 언제나 개인이다. 평가가 끝난 자리에서 무너질지, 궤도를 수정할지, 혹은 새로운 설계를 시작할지는 오직 당신만이 정할 수 있다. 평가는 나를 규정하는 문장이 아니다. 다음 장을 준비하라는 신호일뿐이다. 커리어의 주도권은 평가표 위가 아니라, 그 이후의 선택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번에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안도감이 드는 순간, 거기서 한 발만 더 나아가 보자. “지금의 나는 무엇을 유지해야 하고, 무엇을 바꿔야 할까.”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리는 순간, 평가는 더 이상 결과가 아니라 방향이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중연합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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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
    2026-02-10
  • [이창호스피치] 질문 능력이 곧 경쟁력인 이유
    [대한기자신문 이창호 소통전문가] 시장은 더 이상 정답을 빨리 찾는 사람에게 보상을 주지 않는다. 이미 알려진 답은 값이 싸지고, 복제는 순식간에 이뤄진다. 오늘날 경쟁력을 가르는 기준은‘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묻느냐’에 있다. 질문의 수준이 사고의 깊이를 결정하고, 그 깊이가 곧 수익의 구조를 바꾼다. 성공한 비즈니스의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하나의 질문에 닿는다. “이걸 더 싸게 만들 수 있을까?”가 아니라 “사람들은 왜 불편함을 참고 있을까?”, “고객은 진짜로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가?” 같은 질문이다. 창의적 사고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아니라,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를 의심하는 능력에 가깝다. 질문을 잘하는 사람은 문제를 다르게 정의한다. 같은 시장을 보더라도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아직 충족되지 않은 틈이 있다’고 묻는 사람의 결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돈은 노력의 양보다 문제 설정의 정확도에 반응한다. 그래서 질문은 곧 전략이 된다. 교육 현장과 조직 문화에서도 질문은 종종 불편한 존재다. 질문은 속도를 늦추고, 기존 질서를 흔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이 사라진 조직은 곧 혁신을 잃는다. 상명하달식 보고는 유지될지 몰라도, 새로운 수익 모델은 태어나기 어렵다.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에서는 창의성도, 성장도 지속되기 힘들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무엇을 더 배워야 할까”보다 “이 배움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가”를 묻는 순간, 공부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바뀐다. 질문이 명확해질수록 선택은 줄어들고, 집중은 깊어진다. 이것이 질문이 돈이 되는 이유다. 결국 질문 능력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훈련의 결과다. 매일 접하는 정보 앞에서 한 번 더 묻는 습관, 당연함에 잠시 멈춰 서는 용기다. 그리고 불편한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태도. 이 작은 차이가 장기적으로는 경쟁력의 격차를 만든다. 답은 누구나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질문은 언제나 희소하다. 그리고 시장은 늘 희소한 것에 값을 매긴다. 글/사진 : 이창호 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 대표, 대한명인(연설학), 스피치마스터의 생산적 말하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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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8
  • [대한기자신문] 검이불루 화이불치, 사회 지도층의 품격은 어디에서 증명되는가
    [대한기자신문 이창호 칼럼니스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이 고사성어가 법정에서 인용된 장면은 단순한 수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개인의 생활 태도를 넘어, 오늘날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적 기준과 공적 책임을 다시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사회 지도층은 법적 지위나 직함 이전에 영향력을 가진 존재다. 정치·경제·문화·언론 등 각 영역에서 이들의 언행과 소비, 관계 맺기 방식은 사회 전반의 규범을 형성한다. 문제는 이 영향력이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 있다. 개인의 선택처럼 보이는 행동 하나가 사회적 신호로 작동하고, 때로는 불공정과 특권의 상징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지도층의 삶은 언제나 공적 해석의 대상이 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이 지점에서 오래된 기준이자 여전히 유효한 잣대다. 검소함은 미덕을 과시하기 위한 연출이 아니며, 화려함은 권력을 증명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지도층의 품격은 소비의 규모가 아니라 태도의 절제에서 드러난다.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인식하고 있는가, 영향력을 사적 욕망의 방패로 사용하지는 않았는가가 핵심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지도층의 사적 영역에 관대한 편이었다. “법적으로 문제없다”는 말은 종종 모든 비판을 차단하는 만능 방패로 사용됐다. 그러나 윤리는 합법의 최소 선을 넘어서는 영역이다. 법이 허용한다고 해서 사회적 신뢰까지 자동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도층일수록 법의 경계선에서 스스로 한 발 물러서는 태도가 요구된다. 이번 고사성어가 소환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특정 개인을 겨냥한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던지는 경고에 가깝다. 지도층의 사적 행위가 반복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회는 건강하다고 보기 어렵다. 불신이 쌓이면 제도는 흔들리고, 공동체의 규범은 약화된다. 신뢰는 가장 천천히 쌓이고, 가장 빠르게 무너진다.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품위는 특권이 아니라 의무다. 많은 것을 누릴수록 더 많은 절제가 필요하다. 영향력이 클수록 사적인 선택은 더 명확한 윤리적 기준 위에 놓여야 한다. 이것이 민주사회에서 지도층이 정당성을 유지하는 방식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그래서 지금의 한국 사회에 유효한 질문이다. 우리는 사회를 이끄는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화려함을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그 화려함이 공정 위에 서 있는지를 묻고 있는가. 지도층 스스로는 자신의 삶이 사회적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가. 작금, 법정에서 울려 퍼진 한 문장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검소하되 초라하지 않고, 화려하되 넘치지 않는 삶. 이는 개인의 도덕을 넘어 사회 지도층이 공동체와 맺는 약속이다. 그 약속이 말이 아닌 실천으로 증명될 때, 사회의 신뢰는 비로소 회복될 수 있다.
    • 헤드라인뉴스
    • 정치
    2026-01-29
  • [일요 칼럼] '아는 길' 앞에 멈춰 서는 용기, 경청이 만드는 최적의 해(解)
    [대한기자신문 이창호 칼럼니스트] ‘아는 길도 물어가라’는 선조들의 격언은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칫 고리타분한 잔소리로 치부되기 일쑤다.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한 치의 오차 없이 목적지에 도달하고, 방대한 데이터를 손안에 쥔 채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며 사는 우리에게 ‘다시 묻는 행위’는 불필요한 지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이 진부한 격언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한다. 확신이 집착으로 변하는 순간, 우리는 가장 위험한 길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 ‘내가 최고’라는 무의식적 오만 경계해야! 인생을 살다 보면 스스로 ‘틀림없다’고 자부하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수년간 쌓아온 경험치와 성공의 기억이 결합하면, 타인의 조언은 소음으로 전락하고 자신의 판단은 신조(信條)가 된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것은 밖으로 드러난 독단보다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나만이 옳다’는 생각이다. 자기 확신은 추진력의 원동력이 되지만, 성찰 없는 확신은 눈을 가리는 가리개가 된다. 나보다 더 나은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성장이 멈춘 지점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닿지 못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도처에 존재하며, 그들의 시선은 내가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비춘다. ■ 신중함의 완성, 마지막까지 문을 열어두는 자세 진정으로 신중한 사람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들이 보여주는 신중함의 본질은 ‘결정의 유보’가 아니라 ‘최상의 의견 수렴’에 있다. 최종적인 결정권이 나에게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마침표를 찍기 직전까지 타인의 의견을 묻는 정성은 결코 유약함의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줄 아는 강한 자존감의 발로다. ▪︎다양성의 수용 내 생각보다 더 나은 대안이 나왔을 때, 그것을 즉각 수용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전문성의 존중 각 분야 전문가들의 통찰을 내 결정의 거름으로 삼는 지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최적의 결과 도출 단순히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는 '가장 적절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리더십의 본질이다. 경청은 최고의 효율이자 품격이다 우리는 흔히 타인에게 묻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길을 되돌아오는 비용에 비하면 이는 가장 경제적인 투자다. 마지막 순간까지 '더 좋은 생각은 없을까?'라고 자문하며 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는 '결과의 완성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 그 결정을 함께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얻는 길이다. 신중함은 단순히 조심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겸허함이며, 타인의 지혜를 빌려 내 부족함을 채우겠다는 적극적인 태도다. 아는 길을 물어갈 때 비로소 우리는 길을 잃지 않는 것을 넘어,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더 아름다운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결국,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나의 옳음'을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최선의 결과'가 있는 곳이어야 한다. 지금 당신이 걷고 있는 그 익숙한 길 위에서, 잠시 멈춰 서서 곁을 돌아보는 여유가 필요한 해(解:깨닫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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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5
  • [대한기자신문] 노자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2,500여 년 전의 사상가 ‘노자’는 정반대의 길을 제시했다. 그는 더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덜어내라고 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날마다 배움은 더해지지만, 도를 따르는 삶은 날마다 덜어진다(爲學日益 爲道日損)”고 말한다. 지식과 기술은 쌓을수록 늘어나지만, 삶의 본질에 다가갈수록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게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성과를 내는 능력과 잘 사는 능력은 다를 수 있다는 경고다. 우리는 흔히 통제하려 든다. 계획을 촘촘히 세우고, 결과를 예측하고, 변수를 제거하려 애쓴다. 하지만 노자는 “억지로 하지 않음으로써 이루지 못함이 없다(無爲而無不爲)”고 말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선택, 과도한 개입을 줄이는 지혜를 말한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듯, 삶에도 자연스러운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조직과 리더십의 문제에서 노자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드러나지 않는 리더, 앞서기보다 뒤에서 받쳐주는 지도자야말로 공동체를 오래 지속시킨다. 노자는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권위를 과시하는 리더십보다 신뢰를 축적하는 리더십이 강하다는 메시지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소진시킨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정작 나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을 잃는다. 노자의 가르침은 단순하지만 깊다.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충분한 것을 보지 못한 채 부족함만 확대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해답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더 채우는 대신 덜어내고, 앞서려 하기보다 함께 가고, 소유하려 하기보다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노자는 이를 ‘약함의 힘’이라 불렀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고, 비어 있음이 가득 참을 가능하게 한다는 역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새로운 기술이나 더 많은 정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쥐고 있는 것 중 무엇을 내려놓을지 선택하는 용기다. 노자는 오래전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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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4
  • [대한기자신문=김민정의 온숨] 커리어에도 ‘회복 탄력성’이 필요하다
    [대한기자신문 김민정 코치]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계획을 세운다. 새 다이어리를 펼치고, 흐트러졌던 마음을 다잡는다. 이번만큼은 다를 것이라고,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겠다고 자신과 굳게 약속한다. 하지만 그 다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듯,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한 달을 겨우 버티다 어느 순간 흐지부지되는 경우도 많다. 그 뒤에 따라오는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역시 난 의지가 약해.” “이번에도 실패네.” 우리는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 곧바로 자신을 ‘실패한 사람’으로 규정해 버린다. 계획의 실패가 곧 ‘나의 한계’가 되어버리는 순간이다. 정말 그럴까. 계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곧 그 사람이 부족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한 번 흐트러져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온다. 반면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자책만 반복한다. 이 차이는 의지의 강약이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실패를 해석하는 방식의 차이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회복 탄력성’이다. 회복 탄력성은 흔히 멘털이 강해서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 힘으로 오해받곤 한다. 하지만 회복 탄력성은 애초에 무너지지 않는 힘이 아니다. 무너진 뒤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타고나는 성향이 아니라, 반복되는 해석의 결과다. 이 이야기는 새해 계획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러한 ‘계획과 좌절의 메커니즘’은 일터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이직을 결심했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다시 제자리에 머무는 순간, 승진에서 밀린 뒤 마음이 꺾이는 순간, 공들여 준비한 프로젝트가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했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이 길이 맞는걸까?” 그리고 종종 이렇게 결론을 내려버린다. “나는 딱 이 정도까지인가 보다.” 하지만 한 번의 좌절이 곧 커리어의 종착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실패 자체보다, 그 실패에 붙이는 해석이다. 실패를 ‘끝’으로 해석하면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되고, 실패를 ‘조정이 필요한 지점’으로 해석하면 다시 움직일 수 있다. 회복 탄력성은 무조건 잘될 거라는 막연한 낙관이 아니다. 억지로 버티는 인내심도 아니다. 그 본질은 감정을 억누르는 데 있지 않고, 사고의 방향을 다시 세우는 데 있다. 같은 상황에서도 “난 역시 부족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멈추지만, “이 부분은 다시 점검이 필요하구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조정한다. 이 작은 차이가 시간이 흐르면 커리어의 방향을 완전히 갈라놓는다. 중요한 것은 다시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일이 아니다. 어디까지는 잘 왔는지, 어디에서 멈추게 되었는지, 그리고 처음부터가 아니라 어디서부터 다시 이어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예를 들어 매일 경제 기사를 읽기로 한 계획이 일주일간 멈췄다면, “난 안 돼”라며 포기하는 대신, “하루 다섯 개는 무리였으니 한 개로 조정해 보자”라고 방향을 트는 것. 그것이 회복 탄력성이다. 실패를 끝이 아닌 중간 지점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사람은 자신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움직일 힘은 늘 그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새해 계획이 무너졌다고 해서 당신의 커리어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몇 번 무너졌느냐가 아니라, 무너진 뒤 다시 돌아올 수 있느냐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계획 앞에서 멈춰 서 있는가. 그리고 그 지점에서,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를 붙이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중연합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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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0
  • [대한기자신문] 슬로우 퓨처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우리는 오랫동안 ‘빠름’을 진보의 증거로 믿어왔다. 더 빨리 생산하고, 더 신속히 소비하며, 남들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이 곧 경쟁력이었다. 기술과 시장은 속도를 기준으로 미래를 설계했고, 개인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가속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 속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방향은 과연 옳았는가? 속도가 극대화될수록 삶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관계는 얕아졌고, 일의 의미는 희미해졌으며, 성장은 숫자로만 남았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만족은 줄어들었고, 생산성은 삶의 온기를 잠식했다. 빠르게 도착했지만, 어디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재다. 이 지점에서 등장한 개념이 ‘슬로우 퓨처(Slow Future)’다. 슬로우 퓨처는 단순히 느리게 살자는 감성적 제안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설계하는 기준을 속도에서 방향과 깊이로 옮기자는 선언에 가깝다. 더 빨리 가는 대신, 제대로 가자는 주장이다. 슬로우 퓨처가 말하는 느림은 후퇴가 아니다. 이는 선택의 문제다.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처리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무엇이 중요한지 선별하는 능력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성장의 크기보다 균형의 질을 중시하고, 단기 성과보다 장기 지속성을 우선하는 태도다. 기술 역시 더 빠른 자동화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보완하고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재정의된다.특히 고령화, 기후 위기, 기술 피로가 동시에 진행되는 지금의 사회에서 슬로우 퓨처는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책임질 수 있는 속도를 선택하는 일이다. 개인에게는 소진을 줄이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길이며, 조직과 사회에는 지속 가능한 신뢰를 쌓는 방식이다. 미래는 반드시 빨라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멈춰 서서 방향을 확인할 때,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슬로우 퓨처는 속도의 시대 이후를 준비하는 사유의 전환이다. 더 늦게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오래 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속이 아니라, 의식적인 감속이다. ☞ 위 내용에 조금 더 관심 있는 분은 필자가 집필한 “슬로우 퓨처”를 e-Book으로 만나보실 수 있음을 참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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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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