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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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수필가 등단,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서울시교육청 산하 초등학교, 테헤란 한국학교 교사 근무, 문교부 장관 표창, 옥조근정훈장 수상, 한국교원 교육논문 금상 수상

                                                                                    녹아내리는 시계

                      

                                                                                                                           한청수/수필가

 

때늦은 폭설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에 잠이 달아나 버렸다. 내일이면 뒤척이는 이 밤도 어제의 한 조각이 되어 널브러진 시간 속으로 스며들고 말겠지. 어느새 한 해의 첫 달이 잘려나간 빈자리에는 조급함과 불안이 깊이 파고든다. ‘그래, 오늘이 나에게 주어진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보자.’ 세네카의 명상록에서 죽음을 늘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며 절제하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지독한 불행 속에서 불안을 다스리려 했던 한 사람의 고뇌에서 스토아 철학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청수.jpg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내리는 시계는 특별한 영감을 준다. 그림 속에는 관모 양의 상자 위에서 카망베르 치즈처럼 녹아 늘어진 시계, 바닥에 뚜껑이 열린 회중시계, 그리고 기형적인 머리 위에 안장처럼 얹힌 또 하나의 시계가 보인다. 앙상하게 죽어버린 나뭇가지에도 늘어진 시계가 걸려 있다. 정상적인 형태를 유지한 주황색 회중시계에는 개미 떼가 들끓고, 파리가 앉아 있다. 개미와 파리는 죽음의 상징처럼 느껴지며, 불안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인식하는 선형적 붕괴와 소멸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편, 그림의 한쪽 배경에는 노을빛 바다와 황금빛 바위가 조용한 고향의 바닷가를 떠올리게 한다.

 

희미한 기억 속 시간여행을 떠나본다. 옛날 아버지의 책장 위에 놓여 있던 탁상시계는 주저앉아 있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 시계는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국민학교 졸업식에서 선행상으로 받은 상품이었다. 학교 농기계 창고 앞에 학생들이 사용하고 던저놓고 간 농기구를 깨끗이 닦아 제자리를 찾아 걸어놓은 것을 본 일본인 교장이 보고 감탄하며 준 특별한 선행상이었다. 어린 마음에도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평생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선한 일을 찾아 하셨다. 나는 가끔 시계를 소중히 가슴에 품고 태엽을 감으며 시간을 맞추는 일이 즐거운 놀이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에는 불안과 초조 없이 사랑스럽고 평온한 시간만이 존재했다. 늘어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나도 어른이 되어 어머니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삶의 여정 속에서 도려내고 싶은 시간이 있다. 지금 떠올려도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억울했던 순간이다. 시집가지 않은 두 명의 고모와 할머니까지 함께 살던 대가족이었다우리 집에는 고모들의 멋쟁이 친구들이 자주 들랑거렸다. 윤기 흐르는 비단 하늘색 유동 치마에 잠자리 날개 같은 분홍 갑사 저고리 속 하얀 손목에  작은 손목시계를 찬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처음 보는 손목시계가 신기해서 만져보고 소리를 들어보며 좋아했다내 모습이 귀엽다며 잠시 시계를 풀어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시계가 사라졌다. 동생들은 아직 아기였고, 당장 손댈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나를 의심하는 눈빛으로 당장 시계를 내놓으라고 했다. 아무리 아니라고 울부짖어도  소용없었다. 결국, 뒷마당 감나무 아래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한 시간 동안 손을 들고 벌을 섰다흔적도 없이 사라진 시계는 끝내 찾지 못했다

 

간밤에 귀신이라도 왔다 갔단 말인가. '귀신이 곡할 노릇' 이다.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은 식구들에 대한 섭섭함이 잊혀 갈 무렵  그 사건이 다시 떠올랐다. 시계가 사라진 지 2년 후, 집 안의 낡은 벽지를 뜯어내고 새 벽지로 도배하던 중이었다. 장롱 뒤 쥐구멍 속을 청소하고 밤송이를 채워 넣으려는 순간 내 순수한 시간을 훔쳐 나에게 도둑 누명을 씌웠던 바로 그 손목시계가 쥐똥과 검불 사이에 뒤엉켜 몰골을 드러냈다. 억울함 속에 숨죽여 살게 한 그 시계를 보며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누구나 살다 보면 날벼락처럼 삶을 삼켜버리는 억울한 일을 겪게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참고 견디면, 집요하고도 정확한 시간의 총알은 결국 모든 것을 밝혀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누군가의 과거, 현재, 미래를 나타내며 눈 녹듯 사라지고, 치즈처럼 부드러워지며, 물처럼 흘러내린다. 그러나 각자가 인식하는 시간의 흐름은 결코 규칙적이지 않다. 우리가 시간에 매혹되는 이유는 그 불규칙성과 유연성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마치 80km 속도로 달아나는 듯한 녹아내리는 시간을 붙잡아 태양을 멈추게 하고 싶다. 행복 분노 억울함을 내가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았다. 말기 암 선고 후, 비로소 세상의 아름다움이 보였다는 환자처럼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릴 때, 우리는 세상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다.

 

녹아내리는 시계는 끝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변하고 있을 뿐이다. 흐물거리는 시간을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시계가 녹아내려도 시간은 여전히 존재하는 건처럼 남은 삶 속에서 의미있는 시간을 찾아야겠다.

 

한청수 약력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수필가 등단,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서울시교육청 산하 초등학교, 테헤란 한국학교 교사 근무, 문교부 장관 표창, 옥조근정훈장 수상, 한국교원 교육논문 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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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수필가 한청수의 ''녹아내리는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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