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연 수필가는 경남 하동 출생, 중앙대학교 건설대학원 건설경영학 전공, 공학석사,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 수필가로 등단,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문예창작반 회원.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원, 건설단체 근무'36년'. 건설교통부장관 표창,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표창을 받은 바 있다
엄마처럼
조선연/ 수필가
은발의 청춘이다. 며칠 전부터 눈에 거슬렸다. 날마다 출근할 일이 없어졌으니 버텼다. 마주칠 사람이 없다 하더라도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예전에 치장하고 다닐 때와 다르다. 염색약을 찾아들고 손거울을 보다가 깜짝 놀란다.안경을 벗으니 거울 속에 엄마가 있다. 처진 눈꼬리, 사탕을 물은 볼살 영락없다. 엄마는 전용 용기에 염색약을 끓이고 사각 거울을 바닥에 내려놓고 칫솔로 귀밑머리부터 싹싹 발랐었다. 나도 따라 해본다. 점점 엄마가 젊어진다. 하얀 머리 곱게 물들인 고운 우리 엄마가 그립다.
“시숙 이리 오이소 우리 집으로 오이소” 엄마는 장독대에 서서 들판에서 소 꼴을 베어 지게에 짊어지고 가는 먼 친척 시숙을 큰 소리로 부른다. 막걸리를 걸러 놓고 한 잔 마시고 가시라고 불렀다. 오시라는 의미를 아는 아재는 대문 밖에 지게를 받혀놓고 들어와 마루에 앉지도 않고 엄마가 휘휘 저어 드리는 막걸리 한 사발을 단숨에 들이켠다. 이어서 안주로 건네는 김치 한 조각을 받아 드시고는 제수께 연거푸 고마움을 전한다. 크면서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자랐다. 그래선지 나의 별명은 ‘주고잡이’다. 친구나 가족들을 만나면 뭔가를 해주고 싶어 안달한다.
50여 가구의 우리 마을은 창녕 조씨 집성촌이다. 한 집 건너 친척이다. 우리 집 장독대는 참새 방앗간과 같은 역할을 했다. 집 안에 사람이 없을 때도 편하게 지내는 동네 분들은 혼자서도 술 항아리를 찾아 한 잔 드시고 가셨다. 동네에 나이 많은 오빠들도 큰소리로 아지매를 부르며 대문을 들어서면 눈치 빠른 엄마는 막걸리 한 대접을 퍼서 목을 축이게 했다. 그 오빠들이 동네 앞 냇가에서 잡은 물고기를 매운탕 끓일 때도 찹쌀고추장을 넣어야 맛이 난다며 우리 집으로 막무가내 들고 오곤 했다. 엄마가 안 계실 때면 자기들끼리 고추장을 퍼내서 끓여 먹고 가기도 했다. 엄마의 편안하고 넉넉한 씀씀이가 우리 집을 찾아오게 되지 않았나 싶다.
엄마는 3대 독자 외며느리셨다. 시조부모님과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시어른들이 드실 술을 직접 빚졌다고 한다. 무거운 하늘 아래서 고단하셨을 법도 한데 한 번도 그랬다는 말씀은 없으셨다. 술을 빚기 위해 무쇠솥 위의 옹기 시루에서 고두밥을 쪘다. 나는 덕석에서 식히는 고두밥을 뭉쳐서 한입에 쏙 넣어 먹던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고두밥이 다 식어서 누룩과 섞이는 것이 안타까워 엄마의 손을 밀쳐 누룩을 툭툭 털어서까지 먹었다. 술을 빚는 순서와 방법은 수없이 봐 눈에 선한데 어떤 방법이 동동주가 되고 막걸리가 되는지 엄마의 비법은 알지 못한다. 배워 놓지 않은 것이 아주 후회스럽다. 요즘 시중 막걸리는 희멀겋고 달고 탄산 맛이 많이 난다. 내가 기억하는 맛은 누룩 냄새가 나면서 달지 않으면서 시지도 않다. 물을 적게 섞어 매우 진하다. 군용 담요로 씌워 놓은 술독에서 뽀글뽀글 술 익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엄마는 그 술 빚는 실력으로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도 아버지 술까지 빚게 되었다. 술뿐 아니라 온갖 음식으로 이웃과 친척들에게 인심을 쓰셨다. 우리 동네에서 최고의 인기 탤런트셨다. 가족이 많지 않아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고 싶어 그러지 않았을까.
시골이 그러하듯이 우리 집에는 닭, 돼지, 소, 개, 고양이 있을 만한 동물들은 다 키우고 있었다. 닭은아침에 닭장 문을 열어 바깥마당으로 나가게 해서 모이를 먹게 하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몰아와야 했다. 내가 모이를 서너 줌 가져가 구구구 하면서 불러도 몇 마리가 따라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 엄마가 구구구 하고 부르면 머리 나쁘기로 유명한 요것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달려와 닭장으로 들어갔다. 엄마를 동물들마저도 좋아했다. 엄마의 큰손에서 아낌없이 뿌려주는 사랑의 모이 덕분에 알도 잘 낳아주어 시골에서 모자랄 영양분을 잘 채워 주었다.
엄마의 친화력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내 것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마는 나눠 먹어라.” 나눠야 사람들과 같이 지낼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다. 어릴 때는 귀담아듣지 않던 가르침이다. 갖고 싶은 것이 있어 졸라대면, “사람이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먹고 싶은 거 다 먹고는 못 사는 기다.”라고 하셨다. 너무 많이 듣고 자랐다. 조카딸이 대학 다닐 때 동아리 방에다 도둑고양이가 낳고 간 새끼 고양이를 데려와 키웠다. 아빠가 동물을 싫어해 날마다 조카딸과 마찰이 일었다. 엄마는 자식이 좋아하는데 아빠가 양보해야 하지 않느냐며 다 늙은 자식을 가르쳤다. 그날부터 평화가 찾아왔었다. 배움이 많지도 않은 분이 어디서 그런 지혜가 왔을까.
은퇴 이후가 인생 2막이라면 무엇이든 베풀고 나누고 살고 싶다. 늘 봉사하면서 살겠다고 했었다. 퇴직 후 사회에 기여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아동안전지킴이는 내 마음을 충족시키는 온전한 봉사활동은 아니었다. 엄마처럼 하면서 사는 것은 자신 없으나 흉내라도 내고 싶다. 도시의 환경이 시골과 다르지만 작게는 옆집과 나누고 가까워지는 것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옆집 분들의 얼굴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이사해서 찾아갈 수가 없었다. 이 추운 날씨가 지나가면 예전처럼 치장하고 아파트 현관문부터 열어 놓고 나도 엄마처럼 “어르신 차 한잔하고 가세요”라고 해볼 요량이다.
▼약력
경남 하동 출생, 중앙대학교 건설대학원 건설경영학 전공, 공학석사,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 수필가로 등단,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문예창작반 회원.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원, 건설단체 근무'36년'. 건설교통부장관 표창,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