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게간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수필가 등단,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한국본격수필가협회 부회장, 서울시교육청 산하 초등학교, 테헤란 한국학교 교사 근무, 문교부장관 표창, 옥조근정훈장 수상, 한국교원 교육논문 금상 수상
빈방
한청수/ 수필가
아들에게서 짧은 메시지와 사진이 왔다. 잔잔한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유명 화가가 그린 한 폭의 수채화다. 온갖 스모그와 종잡을 수 없이 변덕을 부리는 날씨를 피하여 깨끗한 환경 속에서 살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아들이 떠난 지 두 달이 지났다. 태평양 한가운데 작은 섬나라 피지로 이사를 간 것이다. 많이 아픈 엄마 곁에서 위로가 되어 주겠다고 육십이 가까운 아들이 서툰 광대놀음을 하며 재롱을 부려 나를 웃기려고 애를 썼다. 많이 의지가 되었고 아픔을 덜어준 고마운 아들이다.
아들이 쓰던 방문을 살며시 열어본다. 창문 틈 사이로 따스한 햇살이 스며들어 하얀 침대 위에 내려 앉아있다. 봄 햇볕이 덮여놓은 따뜻한 이불 위를 핏기없은 앙상한 손바닥이 아들의 체온을 느껴 보고 싶어 가만히 쓸어 본다. 모든 것이 제자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빈방에 주인만 없다. 무심코 책상 서랍을 열었다. 급하게 쓴 손편지가 한 장 보였다. 이민 가방을 차에 옮겨 싫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떠나면서 전하지 못한 편지인듯싶다. “엄마 고맙습니다. 엄마 아들로 태나서 늘 행복했습니다. 약 꼭 챙겨 먹고 공원 산책 운동도 잊지 말고 해서 제가 돌아오는 날 더 건강한 모습으로 웃으며 만나요” 눈물이 고여 글씨 위로 흘러내린다. 병든 어머니를 두고 먼 나라로 떠나는 아들의 마음이 등에 짊어진 이민 가방보다 무거웠을 것이다.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아들은 추석에 꼭 엄마를 보러오겠다고 약속했다. 당장 비행기를 타고 아들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열일곱 시간 비행할 자신이 없다. 엄마가 쉽게 갈 수 없는 먼 길 위에 있다. 젊은 시절 피지섬에 가는 것이 내 ‘버킷 리스트’였지만 이젠 가보지 못한 길 보다는 추억 속 그 길을 다시 걷고 싶다. 내가 알던 이들을 한 번 더 보는 것이 즐겁다. 앙코르 리스트라고나 할까.
중학교 이학년 때 아들은 제 키보다 큰 가방을 밀고 혼자 미국 유학을 떠났다. 연년생인 세 아들의 비싼 과외비를 내느니 차라리 미국 유학이 낫다 싶어 결정한 일이다. 국제미아가 되지 않고 무사히 학교를 잘 찾아간 아들이다. 그날부터 내 마음속 빈방엔 항상 그 아들이 자리 잡고 나를 겸손하게 만들고 눈물의 기도를 쉬지 않게 했다.
어린 아들을 자유 분망한 나라에 혼자 보냈다는 사람들의 염려와 책망에도 잘 견디고 수렁에 빠지지 않고 바르게 자란 아들이 고마웠다. 고등학교 졸업식에는 졸업생대표 연설을 하며 부시 대통령 상을 받은 다는 졸업식에도 엄마·아빠는 참석할 수가 없었다. 친구 엄마가 찍어 보낸 사진만 보았다. 다른 부모들이 와서 축하할 때 얼마나 쓸쓸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가지 못한 일이 너무 후회스럽다. 이런저런 마음 상한 일들을 혼자 해낸 아들은 맷집을 키워 웬만한 일은 그냥 웃어넘긴다.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그립고 절실했으면 아내와 자식을 두고 주말 부부를 하며 엄마를 돌보겠다고 내 곁을 지켜준 아들에게 한없이 미안하다. 아들과 같이 산 이년이 꿈속 같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지만, 손끝으로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고 그리움이 되어 빈방에 차곡차곡 쌓인다. 그 빈방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간다. 그 안에는 내가 해 주지 못한 따뜻한 말 한마디, 더 안아주지 못한 순간들, 사소한 잔소리에 마음 상했을 그의 표정까지 가득 담겨있다. 어쩌면 나는 그 방 안에 내가 놓쳐버린 시간을 다시 채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떠난 빈방은 숨 막히는 정적만 흐른다. 아들의 발소리 목소리 문 여닫는 소리 하나하나가 그립다. 이 방안에 살아있는 건 아들의 흔적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나의 간절한 마음이다. 때로는 아프게 거절했던 아들의 손길, 떠나던 날 눈가에 촉촉이 젖어 들던 눈물방울, 내 마음속 빈방에 걸어두고 그리움을 삭힌다. 그 방은 이제 기억으로 가득 찬 또 하나의 삶이 되었다. 빈방을 못다 한 사랑으로 메꾸고 다시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며 빈방 문 앞을 서성인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엄마의 기도는 세상 모진 비바람을 막아주는 바람막이가 되어 줄 거야. 빈방에 다시 너의 꿈과 희망, 즐거움이 가득 채워지기를 기다리며 방안 구석구석 쌓인 먼지를 닦는다.
▼한청수 약력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게간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수필가 등단,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한국본격수필가협회 부회장, 서울시교육청 산하 초등학교, 테헤란 한국학교 교사 근무, 문교부장관 표창, 옥조근정훈장 수상, 한국교원 교육논문 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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