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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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명순 수필가는 충남 서산 출신, 2007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세종문학상 수상, 수필집 ‘장미의 이름으로’를 발간을 하였다

바지락

 

이명순/ 수필가

 

봄이 되면 여러 곳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온다. 제일 먼저 남쪽으로부터 매화꽃이 피었다는 소식이 뉴스를 타고 온다. 며칠 지나면 나에게도 빠뜨리지 않고 꽃소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다. 그 소식을 들으면 반가워서 꽃이 벙글었는지 보려고 근처 뒷산으로 뛰어 올라가 본다. 산에는 산수유와 생강나무 꽃이 등불을 밝혀 들고 먼 남쪽에서부터 오느라 지친 봄 손님을 마중 나와 온 산이 노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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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안면도 바닷가에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진달래꽃이 피었어요.’ 그다음은 읽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안다. 진달래꽃 필 무렵의 바지락이 가장 실하다. 그걸 알고 매년 이맘때 바지락을 사곤 했더니 지금이 그때라고 아주머니가 연락해 온 것이다. 바로 주문했더니 택배 상자가 왔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끼룩거리는 갈매기, 짭조름한 바다 내음도 같이 왔다. 바지락이 도착하면 소금물에 담가 어두운 곳에 두고 해감한다. 봄 바지락은 특유의 향과 통통한 살이 쫄깃쫄깃하고 맛있어서 봄철 입맛을 돋우어준다. 마땅한 국거리가 없을 때, 술적심 하기에 그만한 게 없다. 철분도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으니 금상첨화가 아닌가.

 

난 바지락을 보면 여름방학 때 동네 아이들과 같이 갔던 칠전리 바다가 생각난다. 모래밭에는 바닷물에 닳아서 납작한 하얀 조가비가 반짝였다. 바닷가에 사는 아이들이 작은 구멍을 호미로 살짝 파도 죽합이나 바지락이 나오는데, 바다를 잘 모르는 우리는 갯고랑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썰물 때도 아이들 정강이에 닿을 만큼 바닷물이 찰랑거린다. 밀물 때는 바닷물이 제일 먼저 갯고랑에 들어오고, 고랑에 물이 다 차면 갯벌에도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어른들은 바다에 가는 아이들에게 물이 들어오기 전에 바다에서 나오라고 신신당부한다. 물때를 모르는 아이들이 정신없이 놀다가 물에 빠질까 봐 염려하는 것이리라. 아이들은 갯고랑에 물이 불어나기 시작하면 재빨리 모래밭으로 뛰어나간다.

 

한여름 뙤약볕이 엎드려있는 아이들의 등을 따갑게 할퀴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갯고랑에 엎드려 땀을 뻘뻘 흘리며 호미로 개흙을 파내고 잠시 기다린다. 물이 맑아지면 우리가 찾는 게 있는지 매의 눈으로 물속을 샅샅이 훑어본다. 그러나 찾는 것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어쩌다 모래 속에 아기의 하얀 이처럼 작은 바지락이 보이면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신난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방법을 모르거나 능력이 모자라서 일을 힘들게 할 때면 그때를 떠올리곤 한다. 요령 없이 무작정 힘들여 일하면서도 즐거웠던 그때를. 아무리 애를 써도 바구니 바닥이 다 덮이지 않는다. 가벼운 바구니를 들고 집에 가도 많이 캐왔다고 대견하다고 칭찬받던 어린 시절이었다.

 

 

어려서부터 좋아하다 보니 해마다 바지락을 찾게 된다. 곰바지런히 바지락 껍질을 까면서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본다. 단단한 화폭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기하다, 바지락에 그림을 그린 화가는 별의별 그림을 다 그리는 슬기주머니다. 나는 그렇게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누구일까. 그는 풍경화, 인물화를 그릴 뿐 아니라, 직물 디자인도 잘하고 암각화도 잘 그린다.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지 않고 멋지게 그림을 그려낸다. 그가 뛰어난 예술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태중에서 세밀화를 배웠는지 아기 손톱만 한 곳에도 정교하게 그려낸다. 그림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조개껍데기의 타원형 화폭에는 여러 가지 도형이나 오막살이집도 보인다. 오막살이를 보면 섬집 아기노래가 흥얼거려진다. 그 집에는 굴 따러 간 엄마를 기다리다가 지친 아기가 자고 있을까. 가족이 손잡고 나들이 가는 듯한 뒷모습도 정겹다. 어두운 곳에서 작은 전지를 켠 듯, 한 점으로부터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는 그림도 있다. 밝은 빛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두운 밤에 국도를 달리는 자동차 앞을 지나가던 너구리가 겁에 질려 꼼짝못하고 서 있지는 않을까.

 

글자인 듯 아닌 듯 고대 상형문자 같은 것도 보인다. 바위나 동굴에 새겨놓은 오래된 암각화 같기도 하다. 그림을 보다 보면 수천 년 전으로 가서 다른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어떤 화폭에는 잉카의 여인들이 공들여 짜낸 남미의 전통무늬도 보인다. 쿠스코 호텔 근처 야외에 앉아 옷감을 짜던 카르멘 아줌마, 우르밤바강 근처 호텔 앞 노점에서 갖가지 색의 목도리, 가방, 물병 주머니 등을 팔며 한 푼도 소중히 여겨 작은 지갑에 욱여넣던 엘레나 아줌마도 떠오른다. 아이가 세 명이라는 엘레나에겐 티셔츠를 선물했더니 좋아했다. “철새는 날아가고노래가 팬플룻을 타고 끊어질 듯 이어지며 애절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바지락에 그려진 그림은 검정, 흰색, 회색 등 무채색을 주로 쓴다.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하지 못하는 게 아쉽기도 하련만 이 화가는 개의치 않고 수행하듯 그림을 그려낸다. 조각도를 이용하여 조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붓으로 그려내는 것 같기도 하다. 화가 혼자 그려 놓은 걸까. 가끔 잔잔한 물결이 모래를 간지럽히며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사나운 파도가 밀려와 갯벌을 씻어주기도 한다. 변화무쌍한 바닷속에서 누가 빚어놓았을까. 바지락은 갯벌에서 캘 때 서로 부딪히면서 바지락바지락 소리가 나서 바지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말이 있다. 나는 바지런히 그림을 많이 그려내는 게 신기해서 바지락이라고 붙여주고 싶다. 자주 바지락을 먹으며 자연이 빚어낸 여러 가지 그림을 감상할 수 있으니 이 또한 행운이 아닌가.

 

약력

충남 서산 출신, 2007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세종문학상 수상, 수필집 장미의 이름으로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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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주 : 대한기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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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이 한 편의 수필, 이명순 수필가의 '바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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