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술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권리다”
- ❚ 국민이 바로 서야 국가가 바로 선다 정책 제언 ⑩
▲ 김한준 박사 【평생교육,Life-Plan전문가】
“어머님, 이건 QR 찍어야 돼요.”
약국 앞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망설이던 노인은 결국 줄에서 빠져나왔다. 병원 예약도, 주민센터 민원도, 버스 할인 적용도 이젠 휴대폰 속 앱을 다룰 줄 알아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른바 ‘디지털 문맹’으로 분류되는 고령층에게 기술은 벽이자 장벽이다. 빠르게 진화하는 스마트 사회에서, 기술은 어느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전제조건이 되었다. 문제는 단순한 사용법의 어려움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으로 사회에서 배제되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4 디지털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고령자의 디지털 역량 수준은 일반 국민 평균의 60%에도 미치지 못했다. 특히 ‘공공서비스 이용능력’은 52.6%로, 전자출입명부, 정부24, 건강보험, 긴급재난 문자 등의 활용에서 큰 격차를 보였다. 고령층 2명 중 1명은 ‘기기 조작에 대한 불안’으로 서비스 접근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으며, 키오스크 이용을 피하기 위해 외출 자체를 줄였다는 답변도 많았다. 디지털 소외는 곧 정보 소외, 서비스 소외로 이어지며 심리적 위축과 고립감까지 초래하는 실정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현실을 공공정책이 ‘알고도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국 지자체의 80% 이상이 스마트행정을 강화한다며 키오스크 확대, 무인 민원서비스 확대를 추진하면서도, 고령층 민원 불편 해소에 대한 별도 설계는 갖고 있지 않다. 노인을 위한 보조인력이 부족하거나 아예 부재한 기관이 절반 이상이며, 이로 인해 정부서비스 접근의 실질적 장벽이 더 높아지고 있다. 정책이 기술 발전을 앞세운 나머지, 사용자 격차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 ‘디지털 독주’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유럽 국가들은 고령자 디지털 포용을 행정책임의 일부로 제도화하고 있다. 핀란드는 70세 이상 노인을 위한 ‘디지털 튜터’ 제도를 운영하며, 영국은 지역 도서관에 ‘디지털 안심 존(Digital Safe Zone)’을 설치해, 고령자가 익숙한 환경에서 반복 학습할 수 있도록 한다. 일본은 지역 내 고령자 지원 네트워크를 활용해 ‘디지털 반상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민관 연계형 교육이 연중 운영된다. 기술 전환을 국가 시스템 설계의 일부로 보는 철학이 정착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는 ‘노인을 가르치는’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술은 일상생활을 위한 도구이지, 시험을 위한 과목이 아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첫째, 고령자의 눈높이에 맞춘 반복형 생활 실습을 정례화해야 한다. 키오스크, 전자문서, 교통앱 등 실생활 기반의 기술을 반복적으로 다뤄볼 수 있는 공간이 지역 곳곳에 필요하다.
둘째, 젊은 세대와 고령자를 연결하는 멘토링 기반 ‘디지털 동행제’를 제도화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학습을 넘어 세대 간 관계회복에도 기여할 수 있다.
셋째, 지역 공공시설을 거점으로 ‘디지털 안심학교’를 정착시켜야 한다. 복지관, 주민센터, 도서관 등 공간 중심으로 상시 교육 인프라를 갖추면, 비연속적 교육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책 설계자와 운영자에게 분명히 요청한다.
디지털 격차는 단지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존엄의 문제다. 기술에 뒤처진 이들을 배려하는 정책은 가르침이 아닌 동행의 설계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모든 공공서비스는 디지털에 능숙한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감각을 가져야 한다. 키오스크 앞에서 멈춰 선 한 노인의 표정을 외면한 정책은, 국민의 삶을 관리할 자격이 없다.
✔ 디지털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권리다
글/사진: 김한준 박사 【비전홀딩스 원장, Life-Plan전문가】교육·경영·생애설계 분야 전문가. 공공기관 책임자 및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인생 후반기 리더십과 미래사회 전략을 주제로 강의와 집필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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