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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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봉구 박사는 고려대 졸업, 미국 미주리대학교 자원경제학 박사,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 수필로 등단, 한국본격문학가협회 부회장, 고려대 학생처장, 고려대 노동대학원장 역임,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로 있다

부자유친

 

김봉구/수필가, 고려대 명예교수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이다. 아들이 귀여워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안아줄 수도 없던 시대의 이야기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니 그때부터 나를 자네라고 불렀다. 이렇듯 아버지는 항상 의욕을 북돋우어 주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자네 좀 보세라고 했다. 반바지를 입고 있으니 다 큰딸이 있는데 그게 뭐냐고 하시길래 얼른 긴바지로 바꿔입었다. 꾸중은 처음이다. 아버지의 믿음에 금이 가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뇌리에 남는다.

깊은 신뢰 관계는 대학 시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맞이인 형이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여 그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차남으로 태어나서 그때 까지 만 해도 외지의 고등학교나 대학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큰집 자형이 강릉농고 교사로 있어서 그에게 나를 맡겼다. 그곳으로 전학 간 후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 아버지는 등록금과 하숙비를 보낼 때는 매번 장학금 액수만큼은 더 보내주면서 책을 사거나 공부하는데 쓰라고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자신감을 갖고 학교공부에 전념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유학의 꿈을 밝히면서 아버지의 기대가 커지는 것을 느꼈다. 대학에서 아침 일찍 학교도서관에 가서 저녁 늦게 귀가하는 생활이 습관이 되었다. 방과 후에 학생들이 진행하는 스터디 Time반에도 꾸준히 참석하면서 영어공부도 전공 못지않게 열심히 했다. 3, 4학년 때는 ROTC 군사교육도 받으며 시간에 쫓기기도 했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면 옷을 세탁하자마자 가방을 싸 주면서 상경해서 공부하라고 독촉을 해서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야속하게 느껴졌으나 거듭될수록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깊은 배려가 없었더라면 과연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일탈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사귀던 여자가 우리 집을 방문해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어머니는 반대 의사를 나타냈는데 아버지는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 여인이 떠날 때 부산으로 가기로 하고 나도 함께 집을 나왔다. 아버지의 뒤 따라오는 모습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저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우리 둘을 따라오고 있었다. 어떤 말도 남기지 않았다. 나는 지금 생각해 본다. 내 아들이 혼전에 똑같이 행동했으면 어떻게 대응했을까를. 분명히 마음은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과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까. ‘그럴 것 같다.’ 이를 두고 남들은 부전자전이라고 하지 않을까.

부부가 교수로 생활하던 중에 어머니가 62세에 돌아가셨다. 그 후 20년간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며느리 입장은 더 어려웠을 것으로 보였다. 학교에 다니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막내아들은 초등학교에 다녔다. 우리 집은 아내의 태도 때문이긴 하지만 좀 독특했다. 가족이 외식이라도 하려면 신뢰를 받는 며느리가 아버지, 오늘 외식하러 가요라고 졸라야 아버지가 따라나섰다. 그동안 여러 명의 가정부를 거치며 지내 왔지만 가정부를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매일 아버지는 동네 산책을 하다가도 손자가 집에 오는 시간에 맞추어 집에 와서 대기하셨다. 어린 마음에 집에 왔을 때 아무도 집에 없으면 얼마나 마음이 좋지 않을까를 염려해서라고 일러 주었다.

가락동 현대아파트에 살 때다. 아파트부녀회에서 집에 와서 나에게 아파트 동대표회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그때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아내를 보고 가정부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아내도 겸연쩍으면서 그냥 넘어갔다. 그때의 느낌은 무엇인가. 지금 돌아보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상황이라 나도 지나갔다. 아버지가 노인회 회장을 맡고 있어서 사전접촉을 통해 내가 교수라는 신분을 알고 있었다. 우리 사회는 누구라도 잘 알고 와서 부탁하면 거절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뜻하지 않게 동대표회장이 됐다. 문제는 아파트관리사무소의 비리로 관리회사를 교체 해야 했다. 나는 신문공고를 내고 아파트관리 주체 모집에 이어 대표자 회의에서 주민들이 원하는 회사를 선출했다. 동대표 회장을 맡으면서 아파트 부조리를 말끔히 매듭 지었다.

효도하는 길은 무엇인가를 오래 생각해 봤다. 부자유친이란 삼강오륜의 한 구절의 의미를 새겨보았다. 아버지가 만족할 만큼 아들로서 갖추어야 할 예절 못지않게 신뢰를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대화를 통해 돈독한 관계를 이룩하고 평소에 가져야 할 자세와 행동까지도 진솔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나는 직장에서 귀가하면 제일 먼저 아버지 방에 들려서 문안 인사를 한다. 평복으로 갈아입고 아버지 방에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낸다. 아버지는 하루 종일 들은 뉴스를 전해주신다. 나는 미처 보지 못한 신문 내용을 읽으면서 아버지와 대화한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아내와는 비밀이 있어도 아버지와의 사이에는 비밀이 없다. 그만큼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나 교수 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까지도 아버지와 기탄없이 대화 소재로 삼았다. 나는 학교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참여하는 안암산우회 등산모임에서 원로교수님들과 대화를 나눌 때가 많다. 아버지와 비슷한 연령대의 교수님들이다. 나는 효도하는 방법을 언급하면서 집에 가면 매일 아버지 방에서 두세 시간을 함께 지낸다고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마다 원로교수님들의 대답은 칭찬 일색이다. 바로 그것이 가장 효도를 잘하는 방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대화하는 것 이상의 효도가 어디 있겠느냐의 반응이다.

부자유친은 아버지와 나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하는 표현이 아닐까. 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존경과 신뢰와 사랑이 깔려 있음을 뜻한다. 아버지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정관계 政官界로의 진출은 삼가고 후진들의 교육을 전념하는 교육자로 남을 것을 강조했다. 대학에서 귀한 집 자녀들을 잘 가르치고 지도해서 훌륭한 인재를 배출하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김봉구 신.jpg

 

김봉구 약력

고려대 졸업, 미국 미주리대학교 자원경제학 박사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 수필로 등단, 한국본격문학가협회 부회장

고려대 학생처장, 고려대 노동대학원 원장 역임

)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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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이 한 편의 수필, 김봉구 교수의 '부자유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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