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정치는 법으로 다룰 수 없다, 정치는 정치로 풀어야 한다
[대한기자신문 이강문 칼럼니스트] 정치는 결국 사람의 문제다. 제도와 법률이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통찰이며, 국민이 부여한 권력의 본질은 언제나 ‘정치적 판단력’ 위에 서 있다.
요즘 우리 정치는 모든 사안을 법정으로 가져가려는 경향이 짙다.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결이 정치의 대리 무대가 된 듯한 현실이다.
정치는 사라지고, 법과 수사만 남았다. 하지만 정치의 본령은 본디 법정이 아니라 '국회와 광장'에 있다.
법은 명확함을 요구한다. 정치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유동적인 영역이다.
법은 흑백의 경계를 긋지만, 정치는 회색의 현실 속에서 '타협과 조율'을 통해 답을 찾아야 한다.
“정치는 법으로 다룰 수 없다”는 말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만으로는 정치적 현실을 통제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는 냉엄한 진단이다.
정치적 문제는 법으로 재단하기보다 정치의 언어로 풀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갈등이 생길 때마다 ‘수사’와 ‘처벌’을 해법으로 삼는다.
법은 정의를 세우는 최소한의 장치이지,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정치적 접착제가 아니다.
법적 판단은 승패를 가를 뿐, 상처를 봉합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치가 법의 뒤에 숨을수록 사회의 균열은 더 깊어진다.
정치의 영역을 사법의 영역으로 넘기면, 국민은 심판자가 아니라 방청객이 된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는 냉소와 피로만 남는다.
정치의 본질은 ‘조정과 설득’이다. 정파의 이해가 충돌할 때, 그 다름을 조율하는 힘이 정치다.
오늘의 현실정치는 타협을 부정하고, 상대를 제거의 대상으로 여긴다.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이 정의라고 주장하지만, 그 속에는 종종 정치적 복수심이 숨어 있다.
정치가 법의 옷을 입은 감정 싸움으로 변질된 것이다. 그 결과는 분열이며, 국민의 신뢰 상실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위대한 정치인은 언제나 갈등의 불씨를 법정이 아닌 대화의 테이블로 옮겼다.
링컨은 남북의 분열을 법이 아닌 신념과 설득으로 봉합하려 했다.
독일의 브란트는 냉전의 벽을 넘기 위해 ‘무릎을 꿇는 용기’를 택했다.
우리 정치도 그런 용기를 잃었다. 상대를 설득하기보다 고소와 고발로 맞서고, 논쟁의 장 대신 수사기관을 찾는다.
그 결과, 정치의 품격은 낮아지고, 법의 부담은 커졌다.
법의 기능은 질서 유지에 있다. 반면 정치의 역할은 공동체의 방향을 잡는 데 있다.
법이 옳고 그름을 가른다면, 정치는 옳음과 옳음 사이의 균형을 찾는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법이 과잉 개입하게 된다.
그 순간부터 사회는 ‘사법정치’의 늪에 빠진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 인사들이 법정에 서는 악순환은 그 전형적 증거다.
정의를 세운다며 시작한 법치는 종종 정치 보복의 수단으로 오해받는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정치가 정치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국회는 입법기관일 뿐 아니라, 국민 갈등을 조정하는 대표의 장이다.
오늘의 국회는 그 본연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법안은 정쟁의 도구로 쓰이고, 청문회는 진실을 밝히기보다 여론전을 위한 무대가 됐다.
정치가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니, 법이 모든 것을 대신한다. 법은 국민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정치는 냉정한 계산과 따뜻한 인간 이해가 공존하는 예술이다.
정치인은 법률가가 아니다. 국민의 삶과 감정을 읽고, 서로 다른 목소리를 하나의 방향으로 모으는 통합의 중개자여야 한다.
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정치는 결국 국민의 삶에서 멀어진다.
정치의 생명은 관계와 신뢰에 있다. 그 신뢰를 복원하는 첫걸음은, 상대를 법정으로 세우기 전에 먼저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오늘의 정치가 다시 국민 속으로 들어가려면, 법보다 신뢰, 처벌보다 책임, 비난보다 설득의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진정한 정치란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길을 찾는 과정이다. 법이 정의를 세운다면, 정치는 공존의 길을 여는 일이다.
정치는 법으로 다룰 수 없다. 정치란 결국 정치로 풀어야 한다.
법이 세운 정의 위에 정치가 세운 신뢰가 있을 때, 비로소 나라가 바로 선다. 그 신뢰가 바로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정치의 품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