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6-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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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청수 수필가는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 수필 부문 당선,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한국본격문학가협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서울시 교육청 산하 초등학교 및 테헤란 한국학교 교사 근무, 문교부장관 표창, 옥조근정훈장 수훈, 한국교원 교육논문 금상 수상한 바 있다

작은 틈

 

한청수/ 수필가

 

꽃은 오래 머물지 않아서 아름답다. 바지런한 친구가 나를 불러낸다. 신림계곡에 꽃이 만발하였으니 지기 전에 눈에 담으러 가잔다. 성화에 돌덩이처럼 무거운 발길을 내디뎠다. 나서길 잘했다. 멀지도 높지도 않은 도심 근처에 이처럼 아름다운 산이 있다니 짙은 숲과 돌멩이를 감싸며 흐르는 계곡물은 산천어가 튀어 오를 것 같다.

 

한청수 사진 새로.png

 

산 입구부터 산뜻한 꽃향기가 나를 반긴다. 진달래 영산홍 산수유 철쭉 이름 모를 들꽃들까지, 온갖 꽃들이 제각각의 색으로 산을 물들이고 있다. 흩날리는 이팝나무 하얀 꽃잎이 마치 눈처럼 내 어깨에 내려앉는다. 여린 나무의 새싹이 햇빛을 받고 바람에 흔들릴 때면 그린 다이아몬드 보석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걸음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켰다. 꽃향기와 흙내음이 새소리와 바람에 섞여 가슴 깊이 스며든다.

 

오르막길은 숨이 찼지만, 마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내 안에 나쁜 세포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며 새로운 힘이 생긴다. 즐겁게 산등성에 올라서니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열기를 식힌다. 옹기종기 평화로운 마을 전경이 눈앞에 펼쳐져 보인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은 말없이 천천히 흐르고 어느새 산꼭대기에 태양이 걸려 있다. 어느 노시인의 노을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저렇게 지는 거였구나/ 한세상 뜨겁게 불태우다/금빛으로 저무는 거였구나.” 한참을 머물렀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시간 그 순간 쉼이라는 것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알았다. 방향을 바꾸어 자연을 향해 걸어가는 것, 그 속에 잠시 머무는 것이었다.

 

집으로 내려오는 길목 화사한 꽃들 사이에 눈길을 끄는 풍경 하나가 있었다. 한 그루의 큰 소나무가 비바람에 쓰러진 채 누워있었다. 죽은 소나무의 약한 부분이 썩어 떨어지고 앙상한 관솔만 남아 비목 위에 녹슨 철모를 연상케 했다. 생명이 약동하는 화려한 봄의 꽃잔치에,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오래전 전쟁터에서 조용히 쓰러진 병사처럼 고요하고 장엄하다. 뿌리가 드러난 채 아무런 말도 없이 누워있는 나무 앞에서 문득 비목을 떠올렸다. 이름 없이 쓰러졌지만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켜온 존재의 무게가 꽃보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조용히 삶을 견디고, 쓰러진 뒤에도 누군가는 언젠가 그 자리를 돌아보며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러줄 것이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비목을 작사한 한명희님은 풀벌레 울어대는 외로운 골짜기 이름 없는 비목의 서러움을 모르는 아무에게나 불리워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숱한 젊음의 희생으로 이룬 순연한 청춘들의 부토 위에 잘 살게 해준 고마움을 담아 가곡을 잘 부르는 친구가 청량한 목소리로 산 식구들의 귀를 즐겁게 했다. 짝을 찾든 산비둘기, 풀숲에 숨어있든 애벌레, 먹이를 쪼아 먹든 까치까지 모여들기 시작한다. 노랫소리의 화음이 매일 듣던 산울림과 잘 어울렸나 보다. 다행이다. 도시의 소음에 기진한 내 오장이 오랜만에 깨끗한 공기를 실컷 마시고 큰 호사를 누린다.

 

산은 노래하지 않아도 나무는 말하지 않아도 그 자리에 남은 흔적이 전해주는 신선함과 수많은 생명체를 품고 있는 신비감이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젠가 쓰러질 수 있다는 것, 그 자리에 피어난 꽃들은 쓰러진 나무 곁에서 조용히 향기를 내 뿜으며 위로의 미소를 보낸다. 삶의 찬란함 속에 스며든 죽음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 자연의 품이 경이롭다. 산은 아름다웠고 꽃들은 화려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생의 덧없음과 자연순환의 울림은 더 깊은 위로였다. 산은 나에게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찬란함과 쓸쓸함이 공존하는 삶의 풍경을 가르쳐 준 선물이었다.

 

쉼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비행기 표를 끊고 어디 먼 곳으로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누군가에겐 쉼은 해변의 바람일 수 있겠지만 내게 쉼은 일상 속 작은 틈에서 피어오른다. 나만의 쉼터를 찾아 일상을 잠깐 멈추고 숨을 고르고 짧은 쉼을 찾아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그 안에 참 쉼이 있음을 알았다. 지나가버린 어제일,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의 걱정 근심을 관악산 넓은 품에 안겨주고 빈손으로 내려오는 길엔 꽃가루 알레르기인지 참 쉼의 기쁨인지 눈가가 촉촉해져 왔다.

 

한청수 약력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게간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수필가 등단,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한국본격수필가협회 부회장, 서울시교육청 산하 초등학교, 테헤란 한국학교 교사 근무, 문교부장관 표창, 옥조근정훈장 수상, 한국교원 교육논문 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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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권대근 교수 추천, 이 한 편의 수필, 한청수 수필가의 '작은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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