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선유 작가는 1956년 경남 하동 출생, 간호사, 대학강사, 간호학원장이다. 진주여고, 고신대학교 간호학과 동 대학원 졸업, 2008년 유병근 문하에 수필 입문 후 문단 활동, 드레문학회, 일신문학회, 부산문인협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수필과비평작가회의에 몸담고 있고, 2011년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집 '전잎을 다듬다', '은은한 것들의 습작', '몌별', '수비토의 언어' 등이 있다. 2012년 드레문학회 회장, 부산문인협회 이사, 수필과비평작가회의 부산지부장, 드레문학회 동인지 에스프리드레 편집장, 부산수필문인협회 계간지 부산수필문예 편집장, 2020년 제15회 황의순문학상, 제13회 부산수필가문학상 대상 수상, 2025년 현대수필가100인선Ⅱ 수필선집 '우리의 매력 중 하나는 나이'를 발간하였다.
우리의 매력 중 하나는 나이
황선유/ 수필가
좋다. 그대들과 나, 오늘 밤이 그러하다. 이곳 파라다이스 이름까지도 그렇다. 근심 걱정 없는 곳이라니. 구족한 L은 예나 지금이나 우아하다. 명품이 어울린다. 그녀가 명품이다. 오늘 밤만은 까칠한 나조차도 포시럽다. 나는 특별한 날 아이섀도를 칠하곤 하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다. 교장 선생님이었던 J는 둘 사이의 침묵을 어르느라 분주하다. 일부러 생일날에 남편이 선물했다며 목걸이를 자랑한다. 선드러지는 그녀가 오늘따라 돋보인다.
알맞게 깊어가는 이 계절이 좋다. 지금쯤 고향 집 곡간은 가을한 것들로 가뜩할 것이다. 두툼한 스테이크는 가운데가 불그스름하다. 서툴지 않은 칼질이지만 말도 잘 듣는다. 육즙이 입안에 고였다가 흔감하게 목으로 넘어간다. 에스프레소와 함께 따로 뜨거운 물을 담아내는 바리스타는 잘생기고 상냥했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건너편 테이블에 젊은 부부와 어린 딸 둘이 있다. 서너 살쯤 되었을까. 자꾸 눈이 간다. 나도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록사가 저만큼 크면 이곳에 데리고 와야지. 그 아이는 정말 사랑스러울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훔훔해진다.
창밖으로 해운대의 밤바다가 얼비친다. 유리창이 대형 그림 액자 같다. 가끔 그러하듯이 거실 한쪽 벽에 복제품이 아닌 삼십 호쯤 되는 진짜 그림을 거는 상상을 한다. 화가의 아내인 최영애 수필가는 우리 아파트의 한 입주민이 남편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 했다. 그림값이 상당할 것이다. 잠시 J가 자리를 비운 사이 L이 먼저 말을 건넨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편안하군요.”
오늘 밤을 위해 먼저 손을 내민 쪽도 그녀였다. 듬쑥함으로 줄을 세우자면 그녀는 내 앞줄 그 앞줄의 앞줄에 있다.
“지난날들이 그리웠어요.”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말해놓고는 좀 머쓱했다. 심중의 말인 것을 몰라준다 해도 괜찮다. 둘이 말을 잃어버린 것처럼 침묵하다가 이렇게 다시 말을 찾아서 잇는 것은 맡겨진 생이 서로 잠깐 아렸던 탓이다. 사연이 무엇이었든 매몰찬 생 하나가 던진 돌팔매에 야무지게 맞은 까닭이다. 눈곱만큼도 그간의 소원함을 내색하지 않는 것은 못내 서로 그리웠던 때문이다. 그 모든 이유 앞에 비겁하지 않은 나이가 고맙다.
햇수로 꼽자니 다섯 해가 지났다. 다섯 해 그전까지 우리는 같은 교회에 다녔다.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봉사의 기쁨을 공유하고 장차의 소망을 나누었다. 일상의 우선순위는 바르고 단정하며 영성은 충만했다. 그러던 그해였다. 교회의 느닷없는 소용돌이에 마구 휘둘렸던 날들. 무성한 말들. 무정한 말들. 우리 사이에 빙열이 생겼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진 빙열은 기어이 모든 관계를 조각내었다. L이 교회를 떠났다. 남아있는 나는 오랫동안 시도 때도 없이 도지는 어지럼증을 앓았다. J와도 소원해졌다. 습관이던 우선순위는 비꾸러지고 교회를 위한 열정은 매가리를 잃었다. 떠나고 싶었으나 떠날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한 번 교회를 떠나온 경험이 있다. 작은 교회였다. 목사님은 군주처럼 지엄했고 성도들은 어질었다. 한 성도가 담임목사의 눈에 났다. 영성은 두었으나 품격은 버렸는지 담임목사는 공회에서 대놓고 그를 험담했다.
“박사? 내가 파리 뒷달가지를 연구하는 박사를 아는데 평생 파리 뒷달가지만 붙들고 살아서 아는 기라고는 파리 뒷달가지 뿐이라요.”
웅성웅성 성도들이 그에게 물었다.
“혹시 곤충 연구하세요?”
속이 너그럽지 못한 나는 파리 뒷다리에 멀미를 했다. 그렇게 그 교회를 떠나왔다. 다섯 해 전에 떠난 L은 터 좋은 곳에다 전원교회를 개척했다. 봄이 되면 어깨에 얹힌 벚꽃잎을 털며 예배당으로 들어가고, 예배가 끝나고 이번에는 머리에 벚꽃비를 맞으며 집으로 간다고 한다.
오늘 밤 뚝 분질러진 채 그대로인 우리의 시간을 이어붙인다. 불편하고 스산했던 그간의 궤적들을 살푼 지르밟는다. 가을 국화를 뜯어 흩뿌린 듯 은행잎이 떨어져 가만 앉은 듯 한벌 시간의 이음매를 노랗게 덮는다. 문득 메릴스트립 주연의 영화 《사랑은 너무 복잡해》의 대사 하나가 떠올랐다. 당신의 매력 중 하나는 나이예요. 그래, 오늘 밤에는 나이까지 좋다. 우리에게 또 하나 매력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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