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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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선유 작가는 1956년 경남 하동 출생, 간호사, 대학강사, 간호학원장이다. 진주여고, 고신대학교 간호학과 동 대학원 졸업, 2008년 유병근 문학에 수필 입문 후 문단 활동, 드레문학회, 일신문학회, 부산문인협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수필과비평작가회의에 몸담고 있고, 2011년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집 '전잎을 다듬다' '은은한 것들의 습작', '몌별', '수비토의 언어' 등이 있다. 2012년 드레문학회 회장, 부산문인협회 이사, 수필과비평작가회의 부산지부장, 드레문학회 동인지 에스프리드레 편집장, 부산수필문인협회 계간지 부산수필문예 편집장, 2020년 제15회 황의순문학상, 제13회 부산수필가문학상 대상 수상, 2025년 현대수필가100인선Ⅱ 수필선집 '우리의 매력 중 하나는 나이'를 발간하였다

무렴한 글

 

 

 황선유/ 수필가

 

  추석은 잘 지내었는지명절 입성은 그만하였는지언제적처럼 어디 먼 곳으로 나들이라도 다녀왔는지 염치없이 궁금합니다이리 말했으니 그 언제적 일을 들먹여도 괜찮겠지요.  

  웬일인지 그해 추석에 집을 비웠지요. 어린 마음에도 허황함을 어찌하지 못했는가 그해 따라 넉넉한 햇곡이며 과실이며 청명한 가을 하늘에도 눈길 주기를 마다한 채 텃밭으로 난 샛문 옆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나무 작대기로 땅바닥에다 아린 이름을 그어 불렀지요고개를 들면 텃밭에서 흰 머릿수건을 두르고 허리를 굽혀 무슨 남새거리를 솎는 모습이 보였다가 말았다가 했답니다. 그때 어금니 안쪽에서 배어나는 울음을 참아가며 처음으로 쓸쓸함을 배웠습니다세월은 흐르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연필심에 침을 묻혀 꾹꾹 눌러쓰며 배웠던 천자문과 함께 유년의 기억들도 시나브로 잊혀가건만너무 야무진 학습 탓인지 그날 배운 쓸쓸함은 해가 갈수록 더 선연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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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휴일이 좋았다 말았다 하는 것도 나이 탓인가 봅니다. 눈앞에서 얼쩡거리던 아들들도 제 사는 곳으로 떠난 연휴의 마지막 날 오래된 친구들을 불러냈습니다. 직수굿한 친구들은 추석 뒤풀이로 산행이나 하자는 내 말을 흔쾌히 따라 주었어요. 옛날 구서동에 살 때 이후 처음이니 참으로 오랜만입니다이런저런 핑계로 그동안 내내 벼르기만 하던 산행이지요. 신발장 안에 십 년쯤 전에 선물로 받은 등산화가 흙이 묻은 듯 만 듯 아직 그대로 있어 다행입니다발을 넣으니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스쳐 닿는 듯도 했으나 산을 다 내려올 때까지 따로 성가시게 하지는 않았어요.                    

  그새 두어 번 이사를 하였지만 구서동에는 나를 포함 여학교 동창이 넷 있습니다학교가 다른 도시에 있는 걸 생각하면 예사 인연은 아니지요엄마들처럼 또래의 아들딸들을 어질고 반듯하게 키워서 세상에 내보내고 이 나이꺼정 학교와 약국 등의 일터에서 부지런히 일하는, 이런 친구들이랑 금정산을 오르는 것은 긴 세월 동안 무탈하게 살아온 이 동네에 대한 예의이고 애정인가 여깁니다.

  여자 셋이서, 금정산 끝물 푸름 속으로 산길치고는 제법 나붓한 길을 따라 산행의 별달리 정한 목표도 없으니 아무 서두름 없이 느적거리며 걷습니다한 친구는 이 나이에 무슨 시험공부를 한다며 너희끼리 다녀오라는군요어느 글에서 읽었던 덜꿩나무를 산 중간쯤에서 보았어요이름도 친밀하거니와 꽃도 향기도 은은하다고 적혀있었는데 가늘고 마른 가지에 건들건들 달린 이름표를 보고서야 덜꿩나무구나 했을 따름입니다. 그 글에서와 같이 덜꿩나무를 느끼려면 아무래도 내년 오월에 이 산을 한 번 더 와야겠군요. 덜꿩나무의 이름표를 보고 있자니 처음으로 이름표를 달던 날이 떠오릅니다초등학교 입학하던 날 학교에서 받아온 흰 종이로 만들어진 이름표를 건네었지요.

  “니 이름이구나. 이름이 구겨지면 안 된다.”

  하얀 무명 손수건을 반듯하게 접은 콧물받이 위에다 바늘과 실로 종이 이름표를 꿰매어 붙이고는 내 왼쪽 가슴팍에 달아주었어요지금도 무심코 왼쪽 가슴팍에 손이 가는군요그러고 보면 이름이 구겨지는지를 사유해 봄직한 삽시의 여유도 사치인 듯 그저 사는 일로 바쁜 세월을 보내고 말았어요건들건들 이름표라도 달려 있어야만 나임을 알게 하는 저명하지 못한 삶이 저 잎 지고 마른 덜꿩나무와 닮았습니다.

 내친김에 산 정상까지 가기로 했습니다. 고당봉으로 오르는 가파른 바윗길에는 손잡을 곳을 적당하게 나누어 매듭을 엮은 밧줄이 걸쳐져 있었어요산사람들이 코웃음을 흘릴 일입니다만 세상에! 내가 밧줄을 타고 금정산 정상에 올랐군요비록 하산은 허정허정하였지만 이만하면 엔간한 산행에 동행해도 될 듯합니다초행의 피로와 남은 수다를 마저 풀 겸 산 아래 카페에 자리를 잡았어요

  며느리로 산 지 삼십 년이 넘어도 명절 이야기는 애오라지 푸념으로 시작하는군요. 그러나 우리 모두 머잖은 날 그 푸념의 대상이 될 거라는 희붐한 두려움도 함께 나누었습니다한 친구가 아들이 준 추석 선물을 자랑합니다. 어느새 아들의 선물 자랑할 나이가 되어버렸군요.

  혹시 새우깡을 기억하고 있는가요. 여학교 때 처음 새우깡이라는 과자가 나왔어요. 얼마나 맛이 좋던지 새우깡 두 봉지를 소포로 집에 부쳤지요. 달포쯤 후 시골집에 다니러 간 나에게 그 새우깡 한 봉지를 내밀며 하나는 맛나게 먹었다고 말하더군요. 가끔은 그때 새우깡 한 봉지를 참말로 맛나게 먹었는지 기어이 한 봉지를 남긴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 새우깡이 이생에서 내가 했던 마지막 선물이었다는 사실만이 세월 갈수록 가슴 아립니다.

  초저녁부터  잠에서 깨어 뒤척입니다참 보고 싶군요. 천지간에 모녀의 인연으로 잠시 살았던 것이 이렇게 평생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그만인 것인지요. 이런 글도 무렴無廉하기가 이를 데 없다는 것을 알아 하냥 고개만 떨굽니다

 

황선유

1956년 경남 하동 출생, 간호사, 대학강사, 간호학원장이다. 진주여고, 고신대학교 간호학과 동 대학원 졸업, 2008년 유병근 문학에 수필 입문 후 문단 활동, 드레문학회, 일신문학회, 부산문인협회, 부산수필문인협회, 수필과비평작가회의에 몸담고 있고, 2011년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집 <전잎을 다듬다> <은은한 것들의 습작>, <몌별>, <수비토의 언어> 등이 있다. 2012년 드레문학회 회장, 부산문인협회 이사, 수필과비평작가회의 부산지부장, 드레문학회 동인지 에스프리드레 편집장, 부산수필문인협회 계간지 부산수필문예 편집장, 2020년 제15회 황의순문학상, 13회 부산수필가문학상 대상 수상, 2025년 현대수필가100인선수필선집 '우리의 매력 중 하나는 나이'를 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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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이 한 편의 수필, 황선유 수필가의 ''무렴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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