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숙 수필가는 영남대 명예교수, 한국본격작가협회 회원, 대구가톨릭문인회 사무국장 제21회 '에세이 문예' 신인상, 제1회 한국에세이작가상, 제12회 에세이문예작가상, 제3회 해인문학상 수상. 수필집 '대신 생각해 드립니다', '40년 만의 답장'을 펴냈다
기적을 지은 관비 유섬이
김정숙/수필가,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사람들의 모든 동작과 생각이 씨줄 날줄로 짜여 오늘을 만들어 낸다. 삶에서 지었던 어떤 움직임도 사라지지 않는다. 유섬이 ‘묫돌’도 ‘눈앞의 기적’을 짓고 있다.
지난 7월 4일 경남 거제시 거제면 내간리 인근 뒷산으로 ‘유섬이 묘’를 찾아갔다. 마을이 끝난 지점에 이어지는 나지막한 산 입구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었다. 20cm x 50cm 정도의 전혀 다듬지 않은 자연돌, 그 위에 ‘유처자묘(柳處子墓)’라고 새긴 문패를 달고서-.
이런 야산에서 이 돌을 구별해낸 일이 대단하다 싶었다. 처음 찾아 나섰던 교회사연구자 서종태 선생에게 전화했더니, 첫걸음에는 찾지 못했단다. 서 선생과 이 기록을 읽어낸 천주가사 연구자인 하성래 선생은 뒷산을 헤매다가 돌아섰단다. 이후 호남교회사연구소의 김진소 신부가 그곳 관할인 옥포본당 허철수 신부에게 연락해서, 묫돌을 관리해 왔다는 마을 사람을 찾았다. 이처럼 묫돌은 마을 사람들의 관심을 이고 산 둔덕과 구별되지 않는 얕은 봉분 앞에서 150여 년 세월을 엮어 온 것이다. 실제 마을에는 유처자에 얽힌 설화도 여러 버전으로 돌고, 또 유처자가 전라도 음식을 마을에 소개했다고도 전한다. 지금은 봉분 둘레를 나무로 구분 지어 돋우었고, 누군가 손바닥만한 성모상도 갖다 놓았다. 안내판이 잘 되어있다.
조선왕조 시기 중에서 천주교회가 가장 활발히 성장하던 1863년 무렵, 무과에 급제하여 거제도 부사로 와 있던 하겸락(1825~1904)은 천주교 때문에 관비가 되어 71세까지 ‘아이(동정)’를 지키고 살다가 죽은 ‘유씨 처녀’에 대해 들었고 이를 글로 남겼다. 1906년 아들 하용재가 그의 글을 『사헌유집』으로 간행했는데, 2013년 문중 후손인 하성래 선생이 해제를 하다가 관련 기록을 보았다. 글에는 유처자라고만 되어있지만, 교회에서는 그가 유섬이라고 인정한다.『사학징의』에 “딸 유섬이(9세)는 거제부로 보내어 관비로 삼으라”고 했던 여아이다.
묘 입구에 세운 십자가가 눈에 익다. 전주 치명자산 꼭대기에 있는 십자가와 똑같다. 전주에서 순교해서 지금은 치명자산에 묻혀있는 유항검 가족이 처형될 때, 아직 처형하기에 너무 어린 열 살 미만의 자녀들은 관노와 관비로 각지로 보내졌다. 이후 소식이 끊겼다. 그리고 200년도 넘어 가족이 시복될 무렵, 축하 선물처럼 여기 묻힌 딸 유섬이가 나타났다.
1801년 호남에서 엄청난 재력으로 교회 운영과 발전에 열성을 다했던 유항검 가족이 체포되었다. 동생 유관검이 고문에 못 이겨 교우들의 이름을 실토했을 때 불과 며칠 만에 200여 명이 체포될 만큼 유항검은 ‘호남의 두목’이었다. 유섬이의 할머니 안동 권씨는 권근의 후손으로, 조선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의 이모였다. 윤지충은 윤선도의 6대 후손이면서 화가 윤두서의 증손자였는데, 그는 정약종과는 사돈간이었다. 또한 동정부부로 살다 순교한 유섬이의 올케 이순이의 외가는 권일신 집안이다. 즉 초기 교회 핵심 지도자 집안이었다. 그들은 풍남문 형장에서 처형되었는데, 이때 마을도 몽땅 천국으로 이사갔다고 할 정도로 풍비박산되었다. 달레 신부는 “지금 그 집안의 후손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라고 썼다.
관비로 거제부 관아에 도착한 유섬이는 거제부사 이영철에게 인계되었다. 당시 어렸던 유섬이는(7세 혹은 9세) 사대부 집안의 자식이라는 배려인지 내간리에 홀로 사는 노파에게 수양딸로 보내졌다. 그는 노파에게 바느질을 배우며 성장했다. 어느덧 혼사 이야기가 나오자 유섬이는 자녀가 노비가 될까 봐 혼인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후 그는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자 흙과 돌로 꽉 막힌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창문을 통해 음식과 바느질거리를 받으며 살았다. 유섬이는 마흔이 넘어, 그를 지원해 주던 양어머니가 돌아가신 1830년대 중반에서야 그 집을 헐고 나왔다. 그렇지만, 그는 항상 몸을 지키기 위해 칼을 차고 다녔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장한 기지를 기려 ‘유처녀’라고 불렀다. 한편, 1830년대는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선교사가 입국하던 때였다. 이후 삽십여 년 동안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유섬이는 교회와 접촉하지는 못한 것 같다. 다만, 그는 오빠 부부가 지향했던 ‘동정생활’이 교회의 허락과 지도를 받으며 영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삶임을 믿었다. 그는 ‘동정’의 삶을 이어가며 평생 영적 도움을 갈구했을 것이다.
유섬이는 하겸락 부사가 다른 벼슬로 옮겨가려는 시점에 죽었다. 부사는 깨끗한 정절로 지역민에게 존경받는 그를 제대로 장사지내고 암석에 ‘칠십일세유처녀지묘’(七十一歲柳處女之墓)라고 쓰도록 했다.(묘표에는 ‘유처자묘’로 되어있다.)
마을을 나오면서 7살짜리 꼬마가 고향이 그리울 땐 눈앞의 푸른 산을 뒤에서 받치고 있는 ‘청색산’을 보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청색산은 마을 입구에서 보면 꼭 누워있는 사람 얼굴 같다. 그 산을 유섬이의 눈으로 엄마의 얼굴인 듯이 바라보다 돌아서자 바다 내음이 스쳤다. 유섬이는 묻힌 곳보다는 아래쪽에 살았을 터이니 생전에는 이 내음에 더 가까웠겠구나 싶자, 육지에서 살던 아이가 부모 잃고 온몸으로 감당했을 그때의 비릿함이 나를 에워쌌다. 출렁이는 바닷물 소리가 우리를 이어주는 걸까? 순간, 하성래 선생이 기록을 발굴할 때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이었던 사실도 떠올랐다. 그때 위원회를 담당하던 이성효 주교는 이곳 마산교구장으로 왔다. 세상은 이렇게 얽혀 ‘기적’이라고 읽히나 보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처형된 사람이 약 100여 명, 유배자는 약 400여 명이었다. 그중에 40여 명의 여성 유배자가 있었다. 유섬이는 우리가 이름을 찾지 않은 이 여성 유배자들이어디선가 당당하게 살았다고, 또 그렇게 인간다움을 지켜서 일반인도 감동시켰다고 전하는 것 같다. 분명 더 많은 유섬이가 나올 것이다. 유섬이는 희망이다.
▼김정숙
영남대 명예교수, 한국본격작가협회 회원, 대구가톨릭문인회 사무국장
제21회 『에세이 문예』 신인상, 제1회 한국에세이작가상, 제12회 에세이문예작가상, 제3회 해인문학상 수상. 수필집 『대신생각해 드립니다』, 『40년 만의 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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