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수부 수필가는 ROTC 3기로 월남 맹호부대 참전했으며, 고려대와 동국대 대학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국방부 관리정보실에서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다. 2003년 순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순수문학 우수상, 2004년 전쟁문학상, 제20회 순수문학상 대상, 제7회 에세이문예문학상을 수상을 수상했다
육군대학, 내 인생의 탈출구
고수부/ 수필가
엊그제 중학교 교사로 있는 딸이 감기에 눈병까지 있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에 다녀왔다며 문자를 보내왔다. ‘직장생활 참 만만치 않네요’ 그 짧은 말 속에 담긴 고단함이 가슴에 와 닿았다. 순간 전방 2군단 벙커에서 지내던 시절이 떠올랐다. 호랑이 같은 작전처장 S 대령의 억압 아래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던 그 시간은 말 그대로 ‘여삼추’였다.
소령으로 진급하려면 중대장을 거치는 거치는 것이 필수다. 그러나 나는 장래보다 안정을 택해 서울 건국대학교 교관 보직을 받았다. 고난의 길도 가야 함에도 평탄한 길을 택한 결과 소령 진급에서 탈락했다. 주위에서 동기생들이 진급했다는 소식을 듣자 정신이 번쩍 났다. 그제야 마음을 다잡고 부랴부랴 전방으로 지원해 중대장 보직을 맡았고 뒤늦게나마 소령으로 진급했다.

소령 진급하자마자 먼저 진급한 동기생을 따라잡아야겠다는 각오로 육대 시험공부에 도전하기로 했다. 중령 진급을 위해서는 육군대학 이수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입교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체 정원의 80% 이상이 보병 병과에 할당되고 나머지 20%가 기타 병과에 배당함으로 나 같은 공병은 그야말로 바늘구멍이었다. 나는 낯 서른 보병전술 교범 열 권을 구한 후 공부를 시작했다. 전방 비오큐(B.O.Q)의 시멘트 바닥 위에 침대 하나밖에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고시공부하듯 파고들었다. 보병 전술은 거의 암기 과목이었다. 생소한 용어가 도무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사방 벽에 쪽지를 붙여놓고 오가며 외웠다. 어느 날 옆방에 김 소령이 내 방에 한번 와 보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무슨 난리야”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린 끝에 드디어 합격의 영광을 얻었다. 공병 동기생 중에서는 나 혼자였다, 그 기쁨도 잠시 상급부대에서 전입 요청이 들어왔다. 군단 작전처라는 자리였다. 요직이라는 말에 망설임 없이 응했다. 그 자리가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갔다. 처음 작전처에 발령이 나서 작전처장 S 대령에게 신고하던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험한 인상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순간이 신고의 전부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주변 장교들이 그 자리에 보직 받는 나를 보고 이구동성으로 ‘고수부가 호랑이 굴 속으로 들어가는구나’ 하며 한심하게 여겼다고 했다.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부임 첫날부터 날벼락이 떨어졌다. 업무파악도 하지 못한 나에게 다음 날 아침까지 군단 예하 사단의 공사현황을 보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퇴근시간에 열리는 직원회의에서 처장은 군단장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도록 밤새 자료를 정리하라고 했다.
1970년도 후반기 당시에는 남북관계가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으로 38선 전역에 철의 장벽을 세우는 대공사가 진행중이었다. 대전차 장벽, 철조망, 지뢰매설 등 엄청난 작업이 밤낮 없이 이어졌고 그 실적을 매일 보고해야 했다. 처장은 장군 진급을 앞두고 실적을 쌓기 위하여 부하 장교들을 가차 없이 몰아 부쳤다. 퇴근이라는 개념은 아예 없었다. 밤 10시 회의는 예사였고 나는 새벽 4시까지 철야로 수치를 집계했다.
잠을 못 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차트지를 만들어 아침 출근하자마자 보고하면 S 대령은 실눈을 뜨고 숫자를 위아래로 훑어본며 오탈자 하나에도 고함을 질렀다. 밤새 수고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당장 고쳐서 “내일 아침에 다시 가져와”라는 말과 함께 퇴근은 무산되었다. 전자계산기로 계산을 반복해도 졸음에 지친 머리는 자꾸 실수를 했다. 그날 밤도 꼬박 새웠다. 다시 제출한 보고서에도 숫자 하나 틀렸다는 이유로 또다시 야단을 맞았다. 이런 나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 1년 가까이 반복되었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한계란 게 있다면 나는 그 선을 넘기 직전이었다.
소령 진급했다며 좋아했던 것도 순간이었고 이렇게 험난한 곳에 와서 사표를 낼 수도 없고 보직 변경을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길에서 다행히 육군대학 합격이 내게 한 줄기 빛이었다. 일 년 후이면 자동 발령이 나니 그날만 기다리고 버텼다. 하루하루가 여삼추였다. 전방 비오큐에 혼자 지내며 아내가 보낸 편지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단정한 글씨로 적힌 손편지를 읽으며 울컥할 때도 있었다. 내 책상 위에는 늘 ‘신념의 마력’이라는 책이 놓여 있었고 밑줄을 그으며 읽고 또 읽었다. 신념을 가지면 성공할 수 있다는 그 문장이 버티는 힘이 되었다.
마침내 육군대학 입교 명령지가 하달되었다. 해방이었다. 학교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숨통이 트였다. 공부는 내게 취미였다. 노력하면 성과가 나는 분야였기애 이보다 좋은 일이 없었다. 작전처 동료들이 회식을 열어주었다. “고수부 정말 고생 많았어” 그 말에 울컥했다. 꽃 피는 사월 나는 진해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공병 동기생은 나 혼자였지만 보병 포병 병과의 ROTC 동기생이 여럿 있어 반가웠다. 무엇보다 캡퍼스 전체에 부드럽고 푸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때 만약 육군대학이라는 탈출구가 없었다면 나는 그 깜깜한 지하 벙커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길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그 조그만 방 사방에 보병전술 쪽지를 붙이고 밤을 새운 노력 덕분에 나는 암흑의 동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육군대학은 내게 단순한 진급 코스가 아니었다. 구원이었고 재출발이었고 삶을 다시 일으켜 새운 기회였다.
▼고수부
고려대학교 산림자원학과 졸업(학사)
동국대학원 영어교육과 졸업(석사)
월남 맹호부대 참전(ROTC 3기)
미 육군공병학교 측지과정 수료
미8군 JUSMAG-K 연락장교
육군대학 졸업
국방부 관리정보실(육군중령 예편)
전쟁기념관 학예관 정년퇴임
K ․ J 스피치 자문위원
순수문학 등단(2003)
국제 펜클럽 회원
수상
순수문학 우수상
전쟁문학상
제20회 순수문학 대상
제7회 에세이문에문학상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수필집
『댓돌 위의 갈색 구두』
『진주반지』
『「아침 한 때의 행복』
『손자의 비밀』
『아내』
『석양에 물든 가을 바다』
『Beautiful Story(아름다운 이야기)』
『이 모습 이대로』
『추억의 집』
『길에 선 나무는 웃지 않는다』
『어둠울 건너는 빛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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