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길순 수필가는 충남 부여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 2012년 에세이문예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인천문인협회 회원, 한국본격문학가협회 이사, 제17회 한국에세이작가상, 제11회 세종문학상, 제6회 한국에세이문학상, 한국본격문학가협회장상 수상, 수필집 '몸을 퇴고하다' '심장에 새긴 말은 지워지지 않는다'
장롱을 정리하며
이길순/ 수필가, 세종문학상 수상
장롱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 마음에 든 옷 한 벌 제대로 없지만, 아끼느라 장롱 속에 두고 몇 번 입지 않는 옷들이 이제는 한가득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몸이 가로로 퍼진다. 단추가 잘 맞지 않으니 옷을 입을 때마다 비애를 맛본다. 옷을 자주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닌가. 장롱도 짜증을 부릴 만 하겠다. 한없이 받아들여서 더는 못 받겠다는 신호를 보낸다. 옷걸이는 옷걸이대로 서랍은 서랍대로 가득 채워져서 더는 들어갈 데가 없다. 그 동안 아까워서 차곡차곡 개켜서 두었던 것까지 들추어보니, 여벌의 옷들이 짐이 된다.
봄이 오면 장롱 속을 정리하게 된다. 나는 여태까지 안 입는 옷이 있어도 아깝다는 생각 때문에 좀처럼 버리지 못했다. ‘이 옷은 아직 입을 만한 옷인데’ 하면서 정리하려 하다가도 끝내는 과감히 버리지 못하고 만다. 몇 년 전에 큰마음을 먹고 사들인 옷 두 벌이 있다. 원피스 한 벌과 투피스다. 작아져서 못 입게 된 옷이지만 볼 때마다 본전생각도 나고 내년에는 살을 조금만 빼면 입을 수 있겠지 하는 희망 때문에 버리지 못했다. 남편은 이제 안 입는 옷은 정리 좀 하란다. 그가 어찌 내 마음을 알겠는가. 나는 몇 년째 다이어트를 진행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식사량을 줄이고 노력을 해도 한 번 불어난 체중은 쉬이 내려가지 않는다. 더 불어나지만 않으면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국이다.
내 몸을 감싸서 상처입지 않게 보호해주던 옷이지만 낡아서 옷을 버리려고 골라 놓았더니, 유행이 지난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생각으로 언젠가는 입을 수 있지 않을까하고 그대로 둔 까닭이다. 요즘은 옷이 헤져서 못 입는 옷은 거의 없다. 디자인이나 색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오히려 안 입는 편이 아닌가. 때로는 오래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유행에 뒤떨어졌거나 알뜰해서 옷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옷을 못 버리기로 하면, 나도 선수다. 반면에 남편은 옷 정리 선수다. 계절마다 알아서 옷 바꿔놓고 속옷도 서랍에 정리해서 넣어두니 찾기도 쉽고 편리하다. 계절이 바뀌어도 나는 정말 덥거나 추워야 옷을 바꿔 입는다. 동물들도 계절이 바뀌면 털갈이로 옷 바꿔 입기를 하는데 나는 왜 이럴까. 봄이 왔으니 아름다운 봄옷이 장롱 안에서 선택되길 기다리고 있으리라.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서양 속담이 있다. 멋진 옷이 내면까지 아름답게 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옷은 의식도 지배해서, 옷을 잘 차려입고 나면, 행동이나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되어 일거 양득이다. 옷 욕심 많은 주인때문에 장롱이나 서랍이 과포화상태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옷은 사람의 성장과정과 함께 하는 친구인 것 같다. 성장 시기에 키가 자라면 바지 길이나 소매가 짧아지고 옷도 낡아지지만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인연 때문이리라.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라고 받은 옷은 더더욱 버리기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옷들이 살림에 큰 도움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옷은 일회성일 수는 없다. 한 번 사면 몇 년은 입는다. 내가 걸치고 다녔던 옷들을 꺼내놓고 보니 천도 저렴한 것이고 디자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허름하게 느껴진다. 그저 몸에 맞으면 입고 살았다. 이제 중년을 넘기고 보니 색상이나 재질도 좋은 것이 눈에 든다. 내 작은 키에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도 폼이 나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같은 값이면, 재질이나 색상이 좋은 옷을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이제는 촌티나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세련된 것을 골라서 입고 싶어진다.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니다. 세련된 옷을 입으면 생각도 행동도 세련되어질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세련하고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작은 키에 수평지향적인 체형이기 때문에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수수한 옷만 입다가는 멋진 옷은 영영 못 입어 본다. 키 작은 것도 콤플렉스인데 예쁜 옷까지 못 입는다면 내 몸한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렴해도 색상이나 무늬가 아름다우면 좋지 않겠는가.
요즘 남녀들은 우리들 자랄 때하고는 체형이 완전히 다르다. 남자보다 키 큰 여성들도 많다. 늘씬하고 큰 키에 구두까지 하이힐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예쁘게 보인다. 나도 하이힐을 신고 멋진 포즈를 한 번 잡아보고 싶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할 것 같아 사양하기 일쑤다. 이제는 나이에 맞게 세련미와 격에 맞는 옷이나 구두를 찾아보려 한다. 그런 옷들이 어디에서 나를 기다릴까. 똑같은 옷도 장신구 하나로 인해서 품격이 다르게 느껴진다. 옆으로 퍼진 몸매도 아랑곳 하지 않고 젊을 때 입던 옷만 입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젊음은 고상한 색깔도 잘 소화시키지만 나이 들면 피부부터 고상한 색이나 어두운 색은 거부한다. 더욱 칙칙해 보이기 때문이리라.
작달막한 키에 옆으로 퍼진 몸매를 커버해 줄 수 있는 옷은 박스형 옷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박스형 옷에 길들여졌다. 에스라인 형태의 몸매는 아예 타고나지 못했으니 바라지도 않으리라. 인문학 시대에 인문학은 중심주의를 정조준하질 않는가. 나도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지 않으련다. 내 몸에 맞는 디자인을 골라 자신감을 가지고 살고 싶다. 옷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체형이나 나이에 알맞은 옷은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을 고상하게 보이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그 동안 내 몸을 감싸서 춥지 않게 한 옷들을 보니 세련되고 값어치 나가는 옷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제 기능을 다 해준 것 같다. 버릴 것과 간직해야 할 것을 구분해 놓고 보니, 옷마다 기능이 다르고, 모두 각각의 사연과 추억이 있었다.
나는 옷을 살 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옷장이 괴로워한다. 요즘은 겉이 아닌 내면을 아름답게 치장해 줄 수 있는 옷을 사고 싶다. 내가 원하는 걸 뒷받침해주는 것은 값비싼 옷도 아닐 것이고, 에스라인 몸매도 아닐 것이다. 입어서 편하고 검소한 옷이면 좋지 않겠는가. 장롱이 가득 채워졌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도 옷 몇 가지를 사들고 왔다. 막상 외출하려면 옷이 없다는 소리가 새어나오기 때문이다. 새옷도 좋지만 있는 옷을 잘 매치해서 입으며 멋지게 살아야겠다. 장롱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정리된 기분이다. 유행이 지난 옷가지들을 골라서 재활용에 내어놓았다. 훨씬 홀가분해진 마음을 느끼곤 슬며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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