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병용 전남 완도 출신, 숭실대학교 중소기업대학원 수료, 월간 문학세계 시 수필 등단, 월간 문학세계 운영 홍보위원, 한국본격문학가협회 이사, 동작문인협회 운영이사, 시집 '별빛 흐르는 밤', 주) 삼성주얼리 대표
삶의 응어리
최병용/ 수필가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은 꽃길보다 돌길이 더 많기에 그 과정에서 사람에게 받은 상처, 세상에 부딪혀 생긴 흉터를 지닌 채 살아내야 했기에 가슴에 멍이 들도록 아픈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많다.
내가 살던 고향은 80여 호에 인구 260명이 살던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형제지간을 제외하곤 동네 사람이면 아버지 연배이신 어른한테는 오촌님이라 불렀고 나이 차이에 따라 형님 동생으로 부르며 온 마을이 한집안 식구처럼 지냈다. 만일 동네에 애경사가 발생하면 마을 이장이 앰프를 통하여 ㅇㅇ네집이 상을 당하였으니 생업을 중지하고 참여해주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면 모든 생산을 멈추고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모여 삼일장을 치르는데 협조한다. OO이네 집에서 제사를 지내면 아침 일찍 방송하여 제사 지낸 술과 음식을 동네 사람들에게 대접한다. 또 혼례를 치를 때면 가마로 신랑 신부를 태워오고 온 동네 사람들이 전부 모여 잔치를 치른다.
물론 지금은 전복양식 등 모든 어업이 기계화되고 기업화되어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이웃에 누가 사는지를 모르는 도시의 생활처럼 모든 생활이 도시화되어버렸다. 그래서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던 따스한 정이 흐르던 그 시절 그 고향이 지금도 사뭇 그리워진다. 내가 고향에 살면서 나이 22살 때부터 최연소 마을 이장을 2년 동안 맡아서 할 때 일이다. 어느 집에서 어르신이 운명하셨다는 전갈을 받고 곧바로 사무실로 나가 앰프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부음을 알리고 곧바로 상갓집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상주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밤을 새우며 음식을 장만하고 장례준비를 한다. 다음날 망자를 염을 마치고 삼베옷을 입히고 동전 세 닢을 노잣돈으로 넣어서 입관하게 되는데 양어깨에 시퍼런 멍이 심하게 들어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처음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놀라서 마을 어르신에게 왜 저리 시퍼런 멍 자국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이 평소 지게를 너무 많이 져서 생긴 멍 자국이란다. 물론 그 시절에야 모든 짐을 지게로 운반하는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 생각하니 이해는 되면서도 일평생 그 지게의 무게에 시달렸을 그분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삼일장을 치렀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 동네 청년들이 상여를 메고 동네 앞 공터에서 노제를 지낸다. 평생을 살았던 마을과 동네 사람들과 이별을 고하고 미리 정해놓은 산소에 안장이 되었다. 이렇게 삼일장이 끝나면 한 인생이 끝을 맺고 천상에 오른다. 한 백 년도 살지 못한 생을 살면서 왜 그렇게들 힘들게 살아야 하고 또 아웅다웅하며 살아왔을까를 생각하면 한숨이 배어 나온다. 그나마 조금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던 건 그분이 성실하고 열심히 살아온 까닭에 살림이 풍족하였다. 또한, 자손들도 다복하여 장사를 치르면서 소도 잡고 돼지도 몇 마리 잡아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 타지에서 문상을 오신 분들에게도 후한 대접을 할 수 있었으니 좋은 이미지를 남기긴 하였다.
그러나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싶다. 한번 이승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길인 걸 우리는 느끼면서 살아가는가를 생각해본다. 그 이후에도 돌아가신 분들의 마지막 모습을 여러 차례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대다수분들의 남자 어르신들은 양어깨에 멍 자국이 남겨져 있었고 여인네들은 가슴에 어떤 이는 허리와 배 부분에도 멍 자국이 있는 걸 보게 되었다. 우리는 평소에 가슴에 멍이 든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실제 멍들어 있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응어리가 된 그 삶들이 얼마나 힘들고 한이 된 삶들이었을지를 가늠하게 되었다. 고향이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과 전쟁으로 인하여 그 시절 유독 사별 또는 이별 후 홀로되신 여인네가 많았기 때문에 가슴에 한으로 남겨진 여인네들의 멍 자국은 사연을 가득 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 나는 일찍이 스물아홉 살 되던 해 서울로 이사를 왔다. 고향에서 그렇게 긴 세월을 살았던 건 아니지만 고향에서 겪었던 일들이 지금껏 가슴에 남겨져 생생하게 살아난다. 그 멍은 단순히 아픔만을 남긴 건 아니다. 멍이 든 자리에 세월의 무늬가 새겨지고, 상처가 굳어가는 동안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가난하고 힘들었던 고향 생활이었지만 지금도 가슴에는 따사로웠던 정과 후한 인심이 함께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