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정자 수필가는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미리내수필문학회 회원, 동대문문인협회 감사,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동인, 설총문학상 수상, 수필집 'f홀의 위로'
참견의 씨앗
송정자/ 수필가
삼색 버드나무 한 그루 마당에다 심었다. 하얀 물감에 옅은 핑크색을 찍은 듯, 이파리가 은빛비늘처럼 차르르하다. 지지대를 세워 뿌리가 활착될 때까지 끈으로 목대를 묶었다. 모체에서 떼어낸 곁가지도 행여 자리를 잡을까 싶어 줄기 끝을 뾰족하게 자른 뒤 그 옆에다 얌전히 꽂아주었다.
이틀 동안 쉬고 오자는 친구의 제안에 그녀의 원주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점심 요기 차, 메밀 막국수가 맛있는 식당에 들렀다. 어느새 친구와 얼굴을 익힌 주인이 삼색나무 한 그루 가져다 심겠느냐고 묻지 않는가. 우리는 만면에 화색을 띠우며 선뜻 마당 아래 주인장이 가꾸는 밭으로 내려갔다. 줄기가 무성하지 않아 얕을 줄 알았던 버드나무 뿌리가 땅콩줄기처럼 뻗쳐있어 혼자 힘으로 파내기가 힘이 들었다. 친구와 살살 나무를 달래가며 긴 뿌리는 잘려나가게 두고 밭 흙뭉치를 감싸 비닐에 담았다. 가는 길에 농원에서 목대가 실한 미스김 라일락과 진한 루비컬러 봉오리가 옹골진 장미 한 그루도 들여왔다.
삽과 괭이로 땅을 파서 가져온 나무 세 그루를 심고 지지대와 가지를 예쁜 끈으로 묶어주었더니 차림새가 말끔하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는 원주시 부론면에 유럽식으로 집을 지은 지 몇 년이 채 안 된다. 이색적인 빨간 지붕 밑에, 자잘한 몽돌 자갈이 깔린 마당 한쪽에, 테라스 아래, 삼각지대로 나누어 같은 날 심은 세 그루 나무에 곱게 피어날 꽃을 떠올린다. 라일락이 피면서 짙은 향기 날리면, 이어서 장미 꽃송이가 터져 나와 삼색 버드나무가 함께 어울려 노니는 모습을 상상했다. 장미꽃이 지고 나면 한창 연두 잎에 물을 올리고 있는 가녀린 코스모스가 바람에 살랑거리며 가을마당에 합세하리라.
빨간 삼각지붕을 똑같이 앉힌 집 세 채가 나란히 경사를 이루고 있는 마을, 아래와 위쪽 두 집은 입주를 했고, 중간 집을 가진 친구는 주말마다 들리고 있다. 친구 혼자 아침을 맞을 때는 아래윗집에 사는 사람들을 불러 브런치 타임을 가진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먼저 말문을 트고 이집 저집 왕래까지 한다고 하니, 친구의 낯선 모습에 웃음이 난다. 수십 년 동안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아파트 주거문화에 익숙한 친구였다. 현대인의 표본이라 스스로 칭하던 친구가 마당이 있고, 들녘 풍광이 넉넉하게 내려다보이는 전원에서는 마음까지 저절로 트이는 모양이다.
해마다 고독사가 증가하고 있다. 어떠한 사정에 의해 가족이 해체됐거나, 사회적 고립과 자녀 유학, 은둔 생활, 배우자가 세상을 떴거나, 여러 가지 현상에 의한 1인 가구 증가로 홀로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젊은 사람, 노인 할 것 없이 외롭게 세상을 등지는 일이 흔하지 않게 수면으로 떠오른다. 특히 노인들이 임종을 지키는 사람 없이 혼자 돌아가시고 며칠이 지난 후에 발견 될 때에는 마음이 어두워진다. 서울시에서는 여러 가지 예방 정책을 만들고 있다. 현재는 ‘외로움 안녕 120’ 상담 서비스와 ‘은둔 위험가구 세상 밖으로’ 의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한 지자체에서는 움직임 감지기 시스템을 만들어 AI에 기반을 둔 안부확인과 현금성 포인트지원 프로그램을 도입해 활용하면서 살핀 결과, 전체 사망자와 대비해서 고독사의 비중이 소폭 감소되는 일부 성과를 거두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참견의 씨앗 하나 이웃끼리 심으면 어떨까. 옆에 사는 사람의 집에 커튼이 열렸는지, 현관 앞에 신문이나 우유가 그대로 있는지, 밤에 전기불은 꺼졌는지 소소하게 챙겨주는 관심을 가진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작은 참견의 씨앗이 싹을 틔워 죽음을 방치하지 않을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이겠는가. 북적북적, 시끌시끌하게는 아니더라도 늙어서 고독한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에도 고립된 생활을 하는지 모른다.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츠즈키 교수는 오히려 불행한 사람은,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과 같이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마지막까지 있을 곳을 스스로 선택하고 혼자 살더라도 고립되지 않는다면 고독사는 결코 두려워 할 일이 아니지 않은가.
긍정적이고 즐거운 에너지로 살아간다면 행복하게 떠날 수 있지 않을까. 죽는 순간까지 행복하자는 것, 마음 편하게 살자는 것, 그것이면 족하지 않은가.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고, 맛난 음식을 먹고,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보고 싶은 곳을 찾아가는 그런 노후를 떠올려본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놀고, 먹고, 마시면서 즐거이 살라’는 당부가 누가복음에도 있지 않은가. 죽음이 부르는 그 순간까지 황창연 신부는 하루도 빠짐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너무 힘들면 살며시 숨을 멈추자고 말한다. 잘 죽기를 전파하는 전도사처럼 아늑한 잠으로 안내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따로 없다.
미스김 라일락은 어느 정도 피었을까. 장미는 몇 송이나 피었니. 내가 물어보는 말 한마디에 친구는 꽃이 만개한 시골마당 풍경을 하나하나 일러주며 신이 난다. 인디언의 말에 친구란 ‘나의 슬픔을 등에 진 너’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친구가 나의 곁이 되고, 그녀의 삶에도 나의 하루에도 참견의 씨앗 하나 파릇파릇 움트고 있다면 함께 가는 길에 누구보다 자별한 동행자가 되어주지 않겠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저 맘이야” 하며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함석헌 옹의 시 구절이 가슴에 와 닿는 아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