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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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병용 작가는 전남 완도 출신, 숭실대학교 중소기업대학원 수료, 월간 문학세계 시 수필 등단, 월간 문학세계 운영 홍보위원, 한국본격문학가협회 이사, 동작문인협회 운영이사,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동인, 주) 삼성주얼리 대표

사모곡

 

최병용/ 수필가

 

세월에 씻어내고 바람에 흩어 보내 보아도, 가슴 깊숙이 새겨진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시절의 기억은 아리랑 선율처럼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울려온다딸만 셋을 두신 할아버지께서는 대를 이을 아들을 얻고자, 마을에서 2km 떨어진 산중턱 고목나무 앞에 매일같이 정화수를 떠놓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3년을 기도하셨다. 그 정성이 하늘에 닿았던지, 마흔여섯의 노산으로 귀한 독자 아들이 태어났으니 그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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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귀한 아들을 애지중지 키우셨다. 그러나 지나친 과잉보호 속에서, 일본 유학을 준비하며 창씨개명까지 마쳤던 아버지는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유학 대신 혼인으로 삶의 길이 바뀌었다. 열여덟의 어머니는 얼굴조차 알지 못한 채 부모의 뜻에 따라 배필이 되셨고, 그날부터 고난의 길이 시작되었다. 꿈을 접은 아버지의 한은 평생을 풍운아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유학을 다녀온 친구들이 국회의원, 변호사, 해무청장, 문사 국장 등 출세의 길을 걷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버지는 처지를 한탄하시며 방황을 거듭하셨다. 결국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잃으시고, 어머니께는 깊은 한을, 자식들에게는 가난과 고통만 남기신 채, 무더운 여름날 마흔일곱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를 보내신 후, 어머니는 청상과부로 30년을 삼형제를 키우며 눈물과 한숨 속에 세월을 견디셨다. 어머니께서 칠십칠 세에 우리 곁을 떠나셨을 때, 우리는 이제야 좀 편히 사시겠구나 했던 바람이 무너졌다. 모진 가난 속에서도 굳세게 살아내셨던 분이지만, 사실은 고독과 외로움이 무엇보다 힘드셨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제 내 나이가 그 시절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 후회와 그리움이 밀려온다. 우리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어머니의 외로움을 외면한 채 바쁘다는 핑계로 곁을 지켜드리지 못했다.

내가 자주 아이들과 직원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다. 어느 노모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아들은 넉넉했고 작은아들은 단칸방에서 어렵게 살았다. 큰아들 집에서 편히 지낼 수 있었음에도, 어머니는 늘 작은아들 집에서 주무시곤 했다. 큰아들이 그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셨다. “큰애야, 나는 너희가 늘 자랑스럽고 고맙단다. 여기서는 편히 지낼 수 있지만, 혼자 방을 지키다 보면 외롭구나. 그러나 작은아들 집에 가면 비록 비좁아도 밤이면 아들이 내 등을 긁어주고, 손주들이 내 품에 안겨 자는 모습을 볼 수 있단다. 그래서 외롭지 않구나.”

 

 나는 이 이야기를 늘 전하면서도, 정작 내 어머니의 외로움은 헤아려드리지 못했다. 언젠가 어머니를 모시고 안양 동생 집에 가던 날, 어머니께서 요즘은 세상 사는 재미가 없다하셨을 때, 나는 무심코 세상사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우리도 이제 잘 살지만, 아직도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머니는 친구분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지내세요. 용돈은 충분히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어머니는 조용히 듣기만 하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어머니의 마음은 서운함으로 얼룩져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신 날, 나는 회사 업무로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형수님의 다급한 전화어머니께서 쓰러지셔서 건국대 병원 응급실로 가는 중를 받았을 때, 눈앞이 캄캄해졌다. 병원에 도착하니 이미 흰 천에 덮여 계신 어머니 곁에서 형님과 형수님이 오열하고 있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얼굴에 뺨을 비비며 울부짖었다. “어머니, 이제라도 등 긁어드리고, 모시고 여행도 다니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하늘나라에 계시니, 땅을 치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제는 그저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하늘에서 지켜봐 주시고,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했던 삶을 하늘나라에서는 함께하시며 편히 계시길 바랄 뿐이다.

백세 시대라 하지만, 황혼의 외로움과 고독은 옛날의 가난보다 더 쓰라리다. 나 또한 그 나이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깊이 깨닫는다. 그러나 동시에 깨닫는다. 부모의 빈자리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그리움은 세월을 넘어 사랑의 다른 이름이 된다는 것을. 오늘도 문득 어머니의 부르심이 들리는 듯하다. 그 목소리에 답하듯, 나는 남은 날들을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는 기도로 살아가고 싶다.

 

최병용

전남 완도 출신, 숭실대학교 중소기업대학원 수료, 월간 문학세계 시 수필 등단, 월간 문학세계 운영 홍보위원, 한국본격문학가협회 이사, 동작문인협회 운영이사,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동인, ) 삼성주얼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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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이 한 편의 수필, 최병용의 '사모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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