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자신문 이창호 국제다자외교평의회 대표의장] “모든 일에는 그 원인이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만물의 생성과 소멸에는 반드시 원인(原因, aitia)이 존재한다고 설파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근본 틀이었다. 불교의 연기법(緣起法) 또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며 만물이 서로 의존해 존재함을 일깨운다.
우리는 결과를 두고 옳고 그름을 가르며, 때로는 남을 탓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책망한다. 진정한 지혜는 결과를 낳은 원인을 파악하고 그 근본을 제거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정작 실천은 쉽지 않다.
○ 원인을 짚는 지혜
우리의 일상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이다. 업무의 작은 실수, 가정의 오해, 사회의 갈등 모두 원인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시선이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보다 ‘누구의 잘못인가’에 머무른다는 데 있다.
이는 마치 감기에 걸려 고열이 난 환자가 열만 낮추면 병이 나았다고 착각하는 것과 같다. 증상은 잠시 완화될지 모르지만,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병은 언제든 재발한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민폐의 근원을 탐구하지 않고 그 결과만 다스리는 것은 잡초의 줄기만 자르고 뿌리를 두는 어리석음”이라고 경고했다.
사회 문제 역시 표면의 갈등만 봉합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구조적·제도적·인식적 원인이 도사리고 있다.
◇ 탓을 넘어선 성찰
“그 누구의 탓도 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도달한 사람이다.”
이 짧은 문장에는 깊은 인생 철학이 담겨 있다. 탓하기는 고통스러운 결과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는 심리적 방어다.
이는 진정한 해결이 될 수 없으며 문제의 뿌리를 직면하고 치유할 기회를 빼앗는다.
타인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관용을 넘어, 세계와 사건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책임을 성찰하는 태도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가 “중요한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외부의 환경을 원망하지 않고 원인을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의 파도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는 바람을 탓하지 않고 파도를 타는 법을 익힌 서퍼와 같다. 결과에 매몰되지 않고 원인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은 삶의 주도권과 평화를 가져다준다.
■ 아픔을 넘어선 연대
“이 아픔은 우리 모두의 상처이지만,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차별과 혐오가 남긴 상처는 특정 집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치유해야 할 과제다.
그 원인은 두려움과 불안, 경쟁의 논리,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편가르기와 자극적 보도에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차별과 혐오의 벽을 넘어설 때, 우리는 더 따뜻하고 강한 대동 공동체를 세울 수 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동행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바라보려는 공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포용, 더 나은 대한민국을 함께 추구하는 연대의 의지를 의미한다.
◇ 다문화 사회로의 전환은 피할 수 없는 현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대동(大同)’은 모든 차이를 지우자는 것이 아니라, 고유성을 지키면서 공동의 가치와 비전을 위해 협력하는 ‘통일 속의 다양성’을 지향한다.
■ 평화로운 공동체로 가는 길
개인의 삶에서도, 사회의 문제 해결에서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탓(責)이 아니라 탐구(探究)다. 비난과 책임 전가에 몰두하기보다, 어떤 원인이 문제를 낳았는지를 성찰하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이다.
이 길은 쉽지 않다. 우리 내면의 편견과 두려움을 직면할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길만이 진정한 평화와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상처 입은 개인과 분열된 사회는 탓하기의 문화로는 치유될 수 없다.
원인을 직시하고 함께 해결하려는 연대의 실천을 통해서만 더 따뜻하고 강한 공동체, 평화로운 대한민국을 세울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미 도달한 사람”들의 공동체로 한 걸음 다가서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