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이 품은 침묵과 바다가 머금은 무한한 수평선이 종의 울림과 함께 어우러져, 마치 인간의 근심이 한순간 내려앉는 듯한 평화를 선사한다.
[대한기지신문 이창호 기자] 남해군 금산 중턱,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솟은 시찰, 보리암(菩提庵)은 한국 불교 3대 관음기도 도량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신라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사찰은, 천년 세월 동안 수많은 순례객과 기도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받아왔다.
바다와 산이 만나는 자리에 앉은 보리암은 단순한 사찰을 넘어, 마음의 쉼과 깨달음을 찾는 이들에게 성소가 되어왔다.
필자는 2025년 중추 연휴를 맞아 찾은 보리암은 이른 아침부터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금산의 바위절벽에 매달린 듯한 산문을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그윽한 솔향과 함께 청명한 바닷바람이 불어온다.
봉우리 너머로 시야에 펼쳐지는 남해 바다는 은빛 물결로 반짝이며 방문객을 맞는다.
또 그 중심에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소원을 받아온 범종(梵鐘) 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 종을 잡다, 순간의 떨림
많은 이들이 보리암에 올라 범종을 잡는 그 순간을 특별한 경험으로 기억한다.
두 손으로 잡은 종의 차가운 금속감은 묘한 경건함을 전해준다. 무심히 흔들리는 듯 보이지만, 종은 오랜 세월 동안 울림을 품어왔다.
종을 잡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 금속의 차가움 너머로 부드러운 떨림이 전해진다.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그 진동은 소리 없는 기도 같고, 바다와 산, 하늘이 함께 호흡하는 듯한 감각을 선사한다. 종소리를 울리지 않아도, 이미 그 진동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 역사와 전설의 향기
보리암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도량으로, 예부터 남해의 풍랑과 어민들의 안전을 지켜준 신앙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이곳은 지역 주민들이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기도를 올린 곳으로 전해진다.
조선 후기에는 세상살이에 지친 선비들이나 상인들이 보리암을 찾아 잠시 마음을 쉬고, 종소리를 들으며 다시 길을 나섰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그들에게 종소리는 단순한 불교 의식의 소리가 아니라, 마음을 다잡고 세상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는 큰 울림이었다.
● 바다와 산이 품은 도량
보리암에서 바라본 남해의 풍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산수화다. 멀리 다도해의 섬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고, 바닷길을 가르는 하얀 파도와 고깃배가 한가로이 떠 있다.
계절에 따라 바다빛은 푸른 비취에서 은빛으로, 다시 붉은 노을빛으로 바뀐다.
바로 이 풍경 속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힌다.
산이 품은 침묵과 바다가 머금은 무한한 수평선이 종의 울림과 함께 어우러져, 마치 인간의 근심이 한순간 내려앉는 듯한 평화를 선사한다.
● 종소리가 전하는 메시지
보리암의 종소리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마음의 안식을 권한다.
현대인의 일상은 빠르고 소란스럽지만, 종소리는 묵묵히 ‘멈춤’의 가치를 일깨운다.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연과 더불어 숨 쉬는 그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임을 전한다.
또 보리암의 종은 수많은 순례자의 기도와 간절한 바람을 담아왔다. 누군가는 가족의 건강을, 누군가는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며 종을 울린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거듭하며 쌓인 기도의 울림이 오늘날에도 종소리에 담겨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한다.
● 순례의 끝, 다시 시작
종을 잡았던 손을 내려놓고 뒤돌아 나오는 길, 발아래 펼쳐진 남해의 바다가 유난히 빛난다.
그 순간 깨닫게 된다. 종소리는 멀리 퍼져나가지만, 그 울림의 시작은 결국 자기 마음 속이라는 것을.
보리암의 종을 잡는 행위는 단순한 체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조용한 대화다.
그것은 과거의 전쟁과 고난을 견뎌온 이 땅의 기억이자, 지금도 그 평화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기도가 이어지는 순간이다.
● 바다와 울림이 전하는 오늘의 교훈
남해 보리암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찾는 치유의 공간이다. 불교 신앙이 아니어도, 누구든지 종을 잡는 그 순간 자연스럽게 자신을 낮추고 고요히 귀 기울이게 된다.
종소리와 함께 하는 그 짧은 순간은 일상의 번잡함을 잠시 내려놓게 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준다.
보리암의 종을 잡는 일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균형과 평화를 회복하는 작은 시작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중연합일보'에도 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