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만디’는 단순히 느리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과정을 중시하고, 조급함 속에서도 균형과 여유를 잃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대한기자신문=이창호 칼럼니스트] 오늘날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기술의 발전, 정보의 속도, 경제의 순환은 마치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기계처럼 인간의 삶을 재촉한다.
또 ‘속도’가 곧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급격한 변화 속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깊이 있는 성찰과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가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중국인의 전통적 삶의 철학인 ‘만만디(慢慢地)페러다임'을 다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 느림의 미학, ‘만만디’의 지혜
‘만만디’는 단순히 느리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과정을 중시하고, 조급함 속에서도 균형과 여유를 잃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중국 사회에서 만만디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관계의 지혜이자 사회적 미덕으로 자리해 왔다.
상대를 서두르게 하지 않고, 상황을 관망하며,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태도 속에는 인류 공동체적 조화와 내면의 성숙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가치관은 빠른 성과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오히려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빨리빨리’ 문화가 효율성과 경쟁력을 상징했다면, 이제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라는 만만디 가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의 관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진정한 진보는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과 깊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속도의 경쟁에서 잃은 것들
우리는 속도를 앞세운 사회 속에서 무한한 경쟁과 피로를 경험했다.
빠른 성공을 추구하며 잠시의 실패조차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소모되고 있다.
게다가 급속한 발전이 항상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지속 가능한 성장은 단기적 성과가 아니라, 내면의 성찰과 균형 속에서 나오는 힘이다.
예를 들어, 기업이 성급하게 시장을 확장하면 일시적 이익은 얻을 수 있다.
내부 시스템과 사람 간 신뢰가 구축되지 않으면 결국 그 조직은 흔들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회도 문화적·윤리적 기반 없이 속도만 추구한다면 불균형이 심화되고, 갈등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만만디’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점을 경계한다.
급하게 달려가다 길을 잃기보다는,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피고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발전의 출발점이다.
■ 만만디와 현대적 리더십
리더십의 본질은 결단력뿐 아니라 ‘균형감각’에 있다.
중국의 전통 사상인 도가(道家)에서 강조하는 ‘무위(無爲)와 조화의 리더십’은 현대의 만만디 정신과 닮아 있다.
지도자는 서두르지 않되 방향을 잃지 않고, 상황을 기다리되 결단의 순간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글로벌 사회가 직면한 위기, 기후 변화, 불평등, 가치의 충돌, 역시 속도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단기적 대응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해법을 위한 가치 철학적 성찰이다.
만만디의 리더십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해답을 제시한다.
느림을 통해 공유하고, 공유를 통해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리더의 자세다.
■ 문화 속에 담긴 지속 가능의 철학
중국인의 만만디 가치는 문화 전반에 스며 있다.
서예의 붓끝이 천천히 흐르며 먹물을 벗삼아 쌓아가는 과정, 차를 우리는 여유로운 시간 속에서 나누는 대화다.
혹은 전통 정원에서 공간과 시간의 조화를 느끼는 미학, 이 모든 것들이 ‘급하지 않음’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이다.
이 느림의 문화는 단순히 생활습관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바라보는 인류관이다.
인위적 성취보다 자연의 흐름을 존중하고, 순간의 결과보다 과정의 가치를 중시하는 태도는 오늘날 환경과 윤리, 지속 가능성의 담론과 깊게 맞닿아 있다.
■ 한국 사회가 배워야 할 ‘만만디의 시간’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빨리빨리’ 문화로 대표되어 왔다.
이는 산업화와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지만, 이제는 그 한계를 돌아볼 때다.
조급한 경쟁과 과잉 성과주의는 사회적 피로를 누적시키고, 공동체의 신뢰를 약화시킨다.
지속 가능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속도’보다 ‘방향’을, ‘성과’보다 ‘의미’를 중시해야 한다.
이때 만만디 정신은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느림 속에서 관계를 돌아보고, 성과보다는 과정의 진정성을 되새기는 문화적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이며, 인간 중심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다.
■ 느림 속에 담긴 미래의 길
만만디는 단순한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철학적 가치다.
그 속에는 인내와 절제, 그리고 조화와 배려가 있다.
급변하는 세상일수록 우리는 더 천천히 생각하고, 더 깊이 성찰해야 한다.
속도는 외형을 바꾸지만, 성찰은 본질을 바꾼다.
필자는 “천천히 가도 괜찮다. 다만 멈추지 말라.” 이 말처럼 만만디의 느림은 멈춤이 아니라, 더 멀리 가기 위한 지혜로운 속도다.
한중 문화가 공유하는 이 철학은 오늘의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지속 가능한 평화와 협력의 정신적 자산이 될 것이다.
글:사진 / 이창호
한중교류촉진위원회 위원장 · 대한기자신문 문화칼럼니스트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중연합일보'에도 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