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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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수부 작가는 ROTC 3기로 월남 맹호부대 참전했으며, 고려대와 동국대 대학원,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국방부 관리정보실에서 육군 중령으로 예편했다. 2003년 순수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순수문학 우수상, 2004년 전쟁문학상, 제20회 순수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한 줄의 노래, 한 줌의 글

 

고수부/ 수필가

 

초등학교 시절 나는 음악 성적이 좋지 않았다. 1학년 때 음악실에서 실기시험을 볼 때였다. 한 사람씩 선생님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선생님은 피아노 반주를 해주셨다. 나는 반주와 박자를 맞추지 못해 상··하 중 을 받았다. 그 작은 성적표의 점수 하나가 유독 마음에 남았다. 그때부터 나는 음악에는 소질이 없다고 스스로 낙인찍었다. 그 후로 어디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오면 숨고 싶었다.

 

고수부 사진.jpg

 

·고등학교 시절에도 음악 시간은 늘 고역이었다. 오선지만 봐도 눈이 아팠고 음표는 아무리 봐도 외계 문자 같았다. 성인이 되어 교회 찬양대에 섰을 때도 악보는 거의 보지 못하고 옆 사람의 음성만 따라 부르곤 했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화면 자막이 박자를 알려줘도 그조차 잘 맞추지 못했다. 나와 음악은 인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체념했다.

 

그러나 노래는 잘 못 불러도 듣는 것은 좋아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는 언제나 귀에 익고 정겨웠다. 1950년대, 어머니는 벽걸이 라디오를 켜놓고 자주 유행가를 따라 부르셨다. “삼다도라 제주에는 돌맹이도 많은데로 시작하는 노래는 하루에도 여러 번 흘러나왔다. ‘목포의 눈물’, ‘나그네 설움’, ‘애수의 소야곡등 그 시절 어머니의 노래가 오늘까지 내 마음 한켠에 남아 있다. 그 멜로디가 들릴 때면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세월이 흘러 장년이 되자 나는 트로트를 즐겨 들었다. 설운도의 사랑의 트위스트는 언제 들어도 흥겨웠고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잠깐만은 질리지 않는 명곡이었다. 특히 의사 출신인 주현미가 평생 가수의 길을 택했다는 점에서 음악이 학문이나 직업을 넘어선 예술의 세계라는 사실을 느꼈다. 영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팝송도 즐겨 들었다. 비틀즈의 Let It Be, 엘비스 프레슬리의 Love Me Tender, 조시 그로반의 You Raise Me Up같은 노래들은 가사를 노트에 적어 외우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일요일 저녁의 열린음악회’, 월요일 밤의 가요무대’, 일요일 낮의 전국노래자랑을 즐겨 본다. 음악을 직접 하지는 못하지만 음악은 내 일상 속에 언제나 스며 있다. 예술은 표현하는 자만이 아니라 느끼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도 같은 감동을 준다. 글을 쓰는 작가가 생산자라면 독자는 감상의 주체이자 협력자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문학이 완성되듯 노래를 부르는 가수와 듣는 청중이 함께할 때 비로소 음악은 살아나지 않을까.

 

지난 추석 명절, 나는 오래 기다려온 KBS 특별방송을 시청했다.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조용필 단독 콘서트였다. 1998년 이후 28년 만의 단독무대라고 했다. 공연장은 무려 18천 석 규모의 고척스카이돔’. 표는 3분 만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나 같은 사람은 직접 가볼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TV로라도 본다는 것이 감사했다. 저녁 720, 채널을 돌리던 순간 조용필의 얼굴이 화면에 비쳤다. 그 순간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하얀 상의에 검정 바지를 입은 그는 여전히 청년 같았다. 7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목소리였다. 40년 전과 다름없이 또렷하고 힘찼다. 그는 하루라도 연습을 거르면 목소리가 달라진다며 지금도 하루도 쉬지 않고 훈련한다 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도 문득 글쓰기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한 줄이라도 쉬지 않고 써야만 감각이 살아난다는 것 그것은 음악이나 문학이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무대는 거대한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수만 명의 관객이 손에 든 하얀 응원봉을 흔들며 함성을 쏟아냈다. 그의 한마디 한 소절에 따라 움직이는 관중의 파도는 장관이었다. 그는 게스트 하나 없이 3시간 동안 28곡을 불렀다. 놀라운 체력과 집중력 그리고 변치 않는 열정이었다. 무대 뒤편의 빅밴드와 수많은 스태프들의 노력이 조화를 이루며 조용필은 음악과 관객의 중심에 서 있었다. 가수와 청중이 하나가 되어 호흡하는 그 순간 그것은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적 공동체였다. 어떤 여인은 노래가 시작되자 눈물을 흘렸고 중년의 남성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멀리 영국에서 날아온 팬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세월을 건너온 음악의 추억과 감사가 배어 있었다.

 

나도 그들과 함께 울컥했다. 화면 속의 관중처럼 나도 손을 흔들며 박수를 쳤다. ‘단발머리’, ‘모나리자’, ‘돌아와요 부산항에’, ‘킬리만자로의 표범그리고 마지막 피날레 곡 여행을 떠나요가 울려 퍼질 때는 나도 모르게 입을 따라 움직였다. “라라라~” 하는 후렴이 흘러나올 때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3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TV를 끄고도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조용필의 노래가 계속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가락이 아니라 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열정과 추억 그리고 꺾이지 않는 생명력이 담겨 있었다.

 

그가 마지막 인사에서 말했다. “저는 아직 노래할 수 있습니다. 노래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서도 작은 불씨가 일어났다. ‘나도 글을 멈추지 말자. 쓰는 한 나도 살아 있다.’ 음악은 단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영혼의 리듬이다. 조용필의 무대는 나에게 예술의 힘이 얼마나 크고 오래가는가를 다시 일깨워주었다.

 

이 순간을 잊지 않으리라. 그리고 바란다. 그처럼 나도 내 글 속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한 줄의 노래가 되기를. 정말로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고수부

고려대학교 산림자원학과 졸업(학사)

동국대학원 영어교육과 졸업(석사)

월남 맹호부대 참전(ROTC 3)

미 육군공병학교 측지과정 수료

8JUSMAG-K 연락장교

육군대학 졸업

국방부 관리정보실(육군중령 예편)

전쟁기념관 학예관 정년퇴임

K J 스피치 자문위원

순수문학 등단(2003)

국제 펜클럽 회원

 

수상

순수문학 우수상

전쟁문학상

20회 순수문학 대상

7회 에세이문에문학상

대통령 표창

국무총리 표창

 

수필집

댓돌 위의 갈색 구두

진주반지

『「아침 한 때의 행복

손자의 비밀

아내

석양에 물든 가을 바다

Beautiful Story(아름다운 이야기)

이 모습 이대로

추억의 집

길에 선 나무는 웃지 않는다

 

 

어둠울 건너는 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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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권대근 교수 추천, 이 한 편의 수필, 고수부 '한 줄의 노래, 한 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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