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한국은 APEC이라는 다자 플랫폼 안에서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전 세계를 잇는 ‘다자주의의 허브국가’로 도약할 시점에 와 있다.
[대한기자신문=이창호 국제다자외교평의회 대표 의장] 세계 질서는 지금 거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이 심화되고, 글로벌 공급망이 재편되며, 인공지능과 기후변화가 기존 경제 질서의 틀을 흔들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다시금 ‘다자주의의 무게’를 시험받고 있다. 그 중심에 한국이 서 있다.
한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룩한 국가로서, 개방경제의 모범이자 기술혁신의 선도국으로 자리 잡았다.
더 이상 ‘변방의 중견국’이 아니라, 국제 질서 재편의 중요한 균형추 역할을 해야 하는 국가로 성장했다.
이제 한국은 APEC이라는 다자 플랫폼 안에서 한반도와 동북아, 나아가 전 세계를 잇는 ‘다자주의의 허브국가’로 도약할 시점에 와 있다.
APEC은 1989년 출범 이래, 지역 내 경제협력과 자유무역의 확대를 이끌어온 대표적 다자 협의체다.
최근 들어 보호무역주의와 지정학적 긴장이 심화되면서 APEC의 역할이 과거보다 약화되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각국이 자국 중심의 이익을 앞세우며, ‘협력보다 경쟁’이 우위를 점하는 흐름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일수록 APEC의 존재 이유는 더욱 명확해진다. 협력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것, 그것이 곧 국제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다자주의의 복원’이다. 미·중 패권 경쟁 사이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기보다, 상호 협력과 균형을 이끌어내는 ‘조정자’ 역할이 필요하다.
APEC 무대에서 한국은 경제적 성과를 넘어, 외교적 신뢰와 문화적 포용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협력의 패러다임을 제시해야 한다.
첫째, 포용적 성장의 아젠다를 선도해야 한다.
한국은 IT, 반도체, AI 등 첨단 산업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아시아 각국과 기술 협력을 심화시킬 수 있다.
단순히 무역을 늘리는 차원을 넘어, 디지털 전환·탄소중립·기후 대응 등 공동의 생존 문제를 논의하는 플랫폼을 주도해야 한다.
특히 ‘그린경제와 디지털경제의 융합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한국만이 가진 강점이다.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의 기술과 경험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견인할 중요한 자산이 된다.
둘째, 평화와 경제를 연계한 한반도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APEC은 경제협력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본질은 결국 ‘평화로운 상호 번영’이다.
한반도는 여전히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동시에 남북 경제협력과 동북아 공동번영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한국이 APEC의 협력 의제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연결한다면, 이는 동북아의 안정은 물론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다.
APEC 무대에서 ‘경제를 통한 평화’라는 담론을 확산시키는 일은, 한국이 제시할 수 있는 실질적 리더십의 표본이 될 것이다.
셋째, 중견국 네트워크를 통한 다자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
호주, 캐나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중견국들은 미·중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모색하며 실용적 협력 방안을 찾고 있다.
한국은 이들과의 연대를 강화함으로써, APEC 내에서 ‘합리적 중재자’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다.
특히 기후, 식량안보, 에너지 위기 등 초국경적 문제는 어느 한 국가의 힘만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한국이 이들 중견국과 함께 다자적 대응체계를 구축한다면, APEC의 협력 구조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넷째, 문화적 소프트파워를 통한 신뢰 외교가 중요하다.
K-콘텐츠, K-디자인, K-푸드로 대표되는 한국 문화는 이미 전 세계에 깊이 스며들었다.
이러한 문화적 자산은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신뢰와 공감의 외교 수단이 될 수 있다. APEC 정상회의와 장관회의 등 공식 외교 무대에서 한국이 문화와 예술을 결합한 외교 행사를 기획한다면, 이는 협력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고, 한국의 존재감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제 APEC은 더 이상 단순한 경제 협의체가 아니다. 인류 운명공동의 문제를 논의하는 ‘미래 협력의 무대’로 진화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주도하는 다자주의는 경제와 외교, 기술과 인문, 경쟁과 공존을 아우르는 복합적 리더십을 요구한다.
21세기 한반도의 운명은 더 이상 주변 강국의 선택에 맡겨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주체적으로 ‘다자주의의 질서’를 설계하고, 그 중심에서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민주주의의 성숙, 기술력, 그리고 국제적 신뢰가 이를 뒷받침한다.
“APEC, 한반도 시대를 준비하자.”이 말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이 세계사 속에서 ‘조정자이자 설계자’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선언이다.
분열이 아닌 연대, 경쟁이 아닌 협력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한국이 세계에 보여줄 새로운 리더십의 형태다.
지금 이 순간, 한국이 APEC을 통해 열어가야 할 미래는 단 하나다.
‘함께 번영하는 아시아, 평화를 설계하는 한반도’ 그것이 진정한 다자주의의 완성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중연합일보'에도 실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