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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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명화 교수는 에세이문예 창간시부터 지금까지 20년간 주간을 맡아오면서 부산교육대학교 대학원, 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론 강의를 하고 있는 송명화 수필가는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되고, 에세이문예 평론가로 등단하여 수필과 평론을 쓰면서 인지도를 넓여왔다. 저서로는 수필집 '순장소녀', ‘꽃은 소리내어 웃지 않는다’ 등 5권, 이론서 ‘본격수필 창작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제1회 김만중문학상 수필 부문 수상자이고, 한국에세이평론상, 풀꽃수필문학상, 부산펜문학상, 부산수필문학상, 연암박지원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대한기자신문에 본격수필을 연재하고 있으며, 23년 작품성을 인정받아 아르코 창작지원금(발간지원) 1,000만원 수혜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흑적

 

송명화/ 수필가.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회장

 

울컥대는 각혈 같다. 내 손에서 짓이겨지는 장록의 열매가 걸쭉한 검은 피를 뚝뚝 흘린다. 누구는 와인을 떠올리고 누구는 공포영화를 떠올리며, 누구는 버리고 싶은 기억을 호출한다. 누가 뭐라든 척박한 땅에 당당히 자리 잡고, 키를 키우고 가지를 쳤다. 저 무시무시한 암적의 열매를 맘껏 매단 장록을 여기서 만난 것은 우연일까. 가슴을 뜯는 아픔을 되짚어 찾아온 어눌한 글쟁이의 마음이 푸닥거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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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하구에는 여러 개의 섬이 있다. 가덕도가 그중 으뜸인데 가덕과 다리로 이어진 섬 중의 섬, 눌차도에 와 있다. 하오의 여백과 바다의 들숨과 날숨을 품은 정거마을을 지나고, 갈맷길을 걸었다. 감탄도 평화로움도 낯선 감정인 것은 진우도를 찾아온 길이라서다. 언덕을 오르니 진우도 안내판이 몸을 드러낸다. 그것을 애꾸처럼 만든 장록 가지를 정리하고 엉긴 얼룩을 물휴지로 닦는다. 방금 찍은 낙인처럼 선명한 핏물을 정성껏 닦는 것과 묵념 외에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지근거리에 기다란 섬이 해파리처럼 떠있다. 진우도, 진정으로 돌봄이 필요했던 고아들의 섬, 아이들은 없다. 삶의 첫 장을 제대로 읽기도 전에 책은 덮였다.

 

낙동강이 열심히 실어 나른 토사가 섬을 살찌웠는지 섬의 흰 뱃구레가 몇 년 전보다 넓어진 듯하다. 사라호 태풍의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 운 좋게 섬을 나섰던 생존자의 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진우도를 찾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작가들과 함께 서둘러 이곳을 다녀온 뒤로 이 섬은 자주 내 생각 속에 떠올랐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찾아드는 무의식의 장에서, 때로는 비바람 몰아치는 큰바람 속에서, 혹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모래폭풍 속에서, 한번은 갯벌을 뒤덮은 들썩이는 기공들 속에서 인원을 어림할 수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엉켜 다녔다. 다시 오리라 하였지만 쉽게 나서지 못하였던 건 그 아픔의 심연을 헤아리기 어려워서다.

 

태풍 사라가 진우도를 들이켰을 때, 이곳에 깃든 전쟁고아 280여 명이 몰살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듯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안내판에 간단하게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인명사고가 발생 철수했는데라고 적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진우도가 거대한 판에 눌려서 길게 늘어진 커다란 봉분처럼 보인다. 그날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공할 만한 태풍의 위력이야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아이들에게 닥친 비극은 제대로 기록되고 제대로 추모되고 있는지. 간단하게 인명사고라 눙쳐놓으니 처음에 나는 한둘인 줄 알았다. 안내판의 감정 없는 글자들이 내 목을 죈다.

 

전쟁고아란 허물을 막 벗은 어린 게처럼 방호막이 없는 신세다. 튼튼한 갑옷이 되어주어야 할 정부가, 어른들이 내어준 장소가 하필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 그것도 강의 퇴적물이 이룬 낮은 모래섬이었단 말이던가. 아무리 전후 혼란기라 하여도 물이 서서 몰려올 때 피해서 달려갈 언덕도 제대로 없는 이곳 말고 아이들을 거둘 자리가 그리 없었던가. 완벽한 전쟁의 피해자지만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왜 자신이 고아가 되었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미약한 생명들이 밀쳐지고 내쳐지다가 그나마 얻은 거처가 바다 가운데 사상누각인 까닭을 누가 해명할 수 있을까.

장록 열매를 따서 꽉 쥐어짠다. 즙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원이름은 미국자리공인데 귀화식물이다. 예전에 이곳 선주가 진우도에 이것이 많이 산다고 일러주었다. 씨앗이 미군의 보급물품에 묻어 진우도에 들어온 것일 터이니 진우원 아이들과 같은 처지였겠다. 대여섯 살짜리부터 있었다는데 피난길에 부모를 놓친 아이도, 폭격 속에 살아남은 아이도 있었을까. 구걸하며 떠돌다 이곳으로 흘러든 아이도 있었겠지. 악몽에 시달리기도, 날마다 먼 바다를 보며 엄마아, 아부지이.” 불러보기도 했으리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단단한 사회공동체를 이룰 수도 있었는데, 비극의 막사에는 작은 비상구조차 없었던 것일까.

 

젊은 날, 매주 가는 고아원에는 유치원에도 가지 못하는 어린 애들이 모여있었다. 인사하는 순간부터 네 발로 가슴에 붙은 아이는 떨어질 줄 몰랐다. 헤어질 때 아이에게 다음을 약속하며 손을 떼어놓는 것이 가장 힘들었는데, 처량하게 응응거리는 아이를 다독이며 나도 눈물 비죽이기 일쑤였다. 세상에 고아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나. 진우원 아이들도 님비현상의 피해자였을까. 앞뒤가 달라 더욱 추운 단어인 님비는 사람들의 수치심을 가린다. 장록도 한때 땅을 산성화시킨다고 유해식물 꼬리표를 달았는데 더 연구해보니 산성화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고 한다. 무지한 말의 칼춤이 홍수를 이루고 부모 잃은 서러움이 피보다 붉더라도 아이들은 장록처럼 꿋꿋하게 살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우우우 갑자기 바람이 운다.

 

섬의 남쪽 아래에 폐허가 된 진우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슴이 비어버린 허름한 우물이 있고, 생명 없는 건물의 뼈대는 누추한 벽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낡아간다. “얘들아.” 부르면 음울한 공기의 떨림이 공간을 채웠다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적막한 구역이다. 한때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몸짓과 조잘거림으로 가득 찼을 폐허를 대중없이 바람이 쓰다듬는다. 햇빛에 몸을 말리는 날은 송구스럽고, 비 맞고 선 날은 슬프고, 회색 하늘 아래 종일 어두운 날은 그 그림자에 조사(弔詞)를 얹을 뿐인 것을. 미리 아이들을 지척의 섬이나 육지로 대피시킬 생각은 왜 못하였을까. 비바람이 몰아치고 바닷물이 몸을 높여 쳐들어올 때 모래섬에 갇힌 아이들의 공포를 대신 느끼는지 친구의 입술이 파래 보인다. 아픈 기억을 깁느라 말이 없다.

 

흑적색 장록 열매가 톡톡 터진다. 내 손에 물이 들었다. 얼마나 분했기에 손길만 스쳐도 저절로 분출하는 것일까. 부모들이 저승에서 흘리는 피눈물 같다. 그들은 아비규환의 주인공이 된 어린 자식들을 어찌 지켜보았을까. 한풀이를 제대로 못 한 섬은 퍼런 바닷물에 둘러싸여 앓고 있다. 보라고, 느끼라고, 잊지 말라고, 그리고 전하라고, 장록 즙액이 내게 적색경보를 날리는 것일까. 창백한 손끝에 전율이 일어 메모하는 볼펜이 떨린다.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섬, 진우도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럴듯한 위령비도 없이 아이들은 어찌 잠들어 있을까. 장록이 우거져 해마다 가슴의 울혈을 대신 토해내는 땅, 언제쯤 흑적의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

 

송명화

   에세이문예 창간시부터 지금까지 20년간 주간을 맡아오면서 부산교육대학교 대학원평생교육원에서 수필창작론 강의를 하고 있는 송명화 수필가는 <전남일보신춘문예 당선되고에세이문예 평론가로 등단하여 수필과 평론을 쓰면서 인지도를 넓여왔다저서로는 수필집 '순장소녀', ‘꽃은 소리내어 웃지 않는다 5이론서 ‘본격수필 창작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1회 김만중문학상 수필 부문 수상자이고한국에세이평론상풀꽃수필문학상부산펜문학상부산수필문학상연암박지원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대한기자신문에 본격수필을 연재하고 있으며, 23년 작품성을 인정받아 아르코 창작지원금(발간지원) 1,000만원 수혜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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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신춘문예 출신 작가 송명화 교수의 '흑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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