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의 끝에서 다시 삶을 배우다
[대한기자신문 김한준 논설위원장] 퇴직 후 처음 맞이한 월요일, 한 남성은 눈을 뜨자마자 낯선 공허함을 느꼈다. 출근 알람이 울리지 않았고, 그를 기다리는 회의도 없었다. 하루 종일 TV 앞에서 시간을 흘려보내던 그는 문득 자신에게 물었다. “이제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일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여전히 ‘일의 부재’ 속에 갇혀 있었다. 한국고용정보원 「중장년 삶의 전환 조사(2024)」에 따르면 퇴직자 3명 중 2명은 “퇴직 후 시간이 남아 불안하다”고 응답했다. 일은 끝났지만, 쉼의 기술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가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구조적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일과 쉼을 대립된 개념으로 인식한다. 퇴직 이후의 여가를 ‘남는 시간의 소비’로 바라보면, 그 시간은 곧 공허로 변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은퇴세대 여가활동 실태조사(2024)」에 따르면 60대 이상 인구의 주당 평균 여가시간은 48시간이지만, 그중 70% 이상이 TV 시청과 스마트폰 사용에 머무르고 있다. 시간은 늘어났으나,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는 이유다. 여가는 시간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회복하는 리듬이 되어야할 것이다.
필자 역시 오랜 공직생활 동안 ‘쉼의 기술’을 훈련하려 노력했다. 퇴근 후에는 짧은 독서나 악기 연습으로 마음의 속도를 늦추었고, 주말에는 제주의 올레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 깨달았다. 쉼은 게으름이 아니라 삶을 다시 작동시키는 준비의 시간이라는 것을. 퇴직 이후의 여가도 마찬가지다. 쉼의 리듬이 안정될 때, 사람은 다시 자기 일상을 디자인할 수 있다.
여가의 리셋은 ‘쉼의 구조’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퇴직 이후의 하루는 24시간의 주도권을 되찾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네 단계의 여가 루틴이 필요하다.
첫째, 회복의 여가가 우선되어야한다. 잠, 산책, 음악, 명상 등 신체와 마음의 피로를 푸는 활동이 일상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둘째, 탐색의 여가를 통해 새로운 관심과 취향을 찾아야한다. 그림, 악기, 여행, 글쓰기처럼 자신을 표현하는 활동이 자존감의 뿌리가 될 것이다.
셋째, 성장의 여가를 실천해야 한다. 국가평생교육진흥원(2024)에 따르면 평생학습 참여자 중 절반 이상이 “삶의 활력이 높아졌다”고 답했다. 배움은 단순한 지식 축적이 아니라, 나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촉매가 될 것이다.
넷째, 공헌의 여가로 확장해야 한다. 지역 봉사, 멘토링, 세대 간 나눔은 자신의 경험이 사회로 이어지는 통로가 될 것이다. 이 네 단계가 균형을 이룰 때, 여가는 개인의 회복을 넘어 사회적 성장으로 확장될 것이다.
여가의 리셋은 개인의 선택이자 사회적 과제다. 지방자치단체와 평생교육기관은 퇴직 세대의 여가를 ‘소비’가 아닌 ‘공헌’의 관점에서 지원해야 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신중년 문화활동 바우처 시범사업(2024)」처럼, 예술·체육·문화활동을 통한 심리 회복 프로그램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기업과 공공기관은 퇴직 전 ‘여가 설계 교육’을 의무화하여, 퇴직자들이 일찍부터 쉼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가는 단순한 여유가 아니라, 삶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는 제3의 리듬이 되어야한다.
이제 독자에게 묻고 싶다.
나는 하루 중 ‘의미 있는 쉼’을 설계하고 있는가,
무의미한 시간 대신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여가를 실천하고 있는가,
새로운 취향이나 배움을 통해 내 안의 세계를 넓히고 있는가,
누군가를 돕거나 나누며 사회와 다시 연결되고 있는가,
그리고 지금의 여가가 내 삶의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이 다섯 질문 중 두 가지 이상이 ‘아니오’라면, 당신의 쉼은 아직 리셋되지 않았다.
퇴직 후의 쉼은 멈춤이 아니라 재구성의 시간이다. 여가의 리셋은 ‘빈 시간’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삶의 감각을 되찾는 여정이 될 것이다. 쉼의 루틴이 자리 잡을 때 사람은 다시 배우고 성장하며, 인생의 후반기를 더욱 단단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결국 여가는 사치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이며, 그 기술을 익힌 사람만이 진짜 자유와 품격 있는 인생의 속도를 누리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