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6-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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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정자 수필가는 한국수필 등단. 지구일보 신춘문예 당선,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미리내수필문학회 회원, 동대문문인협회 감사,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동인, 설총문학상, 동대문문학상, 제3회 권대근문학상 수상, 수필집 'f홀의 위로'가 있다

가시박

 

송정자/ 수필가, 지구일보 신춘문예 당선

 

 

 마른 잎들이 낯빛을 바꾸고 있다. 한때 붉었던 전성기를 접으며 낙하 준비를 한다. 어느 날은 심하게 맞은 볼때기를 만지며 때리는 갯바람을 미워하고, 또 어떤 날은 빗방울 샤워를 시켜준 비님이 고마워 더욱 반짝거렸을 테지. 고운 빛깔을 가진 노란 은행잎을 시기하며 곱게 물들지 못한 점박이 잎 신세에 한숨짓기도 했을 거야. 치열했던 한해살이를 접어 보내느라 연신 잎을 떨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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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한강 길이다. 인적이 없는 산책길에서 노을의 정경을 바라본다는 문단 선배의 초대로 다섯 여인이 행주나루터에 모였다. 늦가을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자며 고조된 기분으로 한강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예전에 행주대교가 바라보이는 나루터 쪽은 강변의 돌방구지가 있던 백사장이었다. 지금은 온통 뻘밭이다. 더러 발밑에서 숨구멍을 내어 뻐끔거리는 참게는 바다로 내려가는 길목에 통발을 치면 잡힌다고 한다. 이 곳은 어획량이 풍부해 아직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있다니 반가운 일이다. 밀물 때는 갯고랑 수풀 속으로 그물을 치면 먹이활동을 하는 장어도 잡힌다. 생태계의 고요한 움직임, 낙엽이 한해를 갈무리 하는 모습, 장어가 살찌우는 소리, 길을 걷는 여인들의 수다, 모든 풍경이 화음이 되어 길을 채운다.

마치 말러의 교향곡, ‘아침 들을 거닐면이 들리는 듯하다. ‘밝고 경쾌한 아침 들을 거닐면 이 세상은 아름답다고 작은 새가 말을 거네.’ 사뭇 가뿐하게 이어지는 플루트의 짧은 전주를 이어받아 관현악의 중간부에 들어가면 해돋이의 정경이 묘사되며 이어 제3부로 접어든다. ‘모든 것이 햇빛에 붉게 타고 음과 빛깔로 가득 차네최초의 선율이 재현되며 행복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일까, 하고 물으며 감미로운 악상으로 바뀌듯, 층층이 마른 풀내음을 들이키며 행주나루 길의 잔잔한 흙 공기에 젖어 갈 즈음이었다.

늦가을로 접어든 들판에 마지막까지 욕망을 놓지 못하는 가시박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강변길을 장악한 상태였다. 이파리는 이미 숨을 다한 종잇장이 되어 말라붙었다. 덩굴만 생태식물의 숨통을 잡고 여전히 감아 오른다. 서리 맞은 줄기마다 엉킨 가시는 투명한 살얼음을 달고 바람이 일 때마다 긁어대는 소리가 난다. 한강을 바라보며 피어올린 풀잎들과 나무는 빛을 잃은 채, 가시박이 쳐놓은 그물 속에 갇혀버렸다. 햇살에 닿지도 못하고 땅 속으로 파고들어갈 씨앗조차 품지 못한다. 함박눈이라도 쏟아져 하얗게 한강변을 덮는다 해도 가시박만은 목 끝을 차올려 유령처럼 떠다닐 기세다. 허락하지 않은 불청객이 따로 있으랴.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정했을 만큼 악명이 높다. 줄기에 난 거친 가시 때문에 제거작업에 난황을 겪는다고 한다. 제초제를 뿌리면 키우는 작농식물이 해를 입을까봐 쓰지 못하고, 농사짓는 이들의 애가 탈 것은 자명해 보인다.

아침 뉴스를 보다가 다시 가시박이 떠올랐다. 아파트에 사는 학부모가 아이에게 빌라에 사는 친구와 놀지 못하게 한다는 기사가 나왔다. 지천으로 늘린 요즘 시대의 아파트가 무슨 주거계급이라도 된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모의 불안이 집의 차별로 변질된다면 아이는 집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무차별하게 뒤덮는 가시박 같은 부모의 의식을 아이들 시선에 투영시켜서야 되겠는가. 가시박은 한겨울에도 감은 덩굴을 풀지 않는다. 자기 생존을 넘어 다른 식물의 숨통을 틀어쥐고 있다. 빛을 가로채어 길을 막고, 스스로의 영역을 자연의 순리로 오인한다. 빌라에 사는 친구와 놀지 말라는 말은 보호가 아니라 아이의 세계에 금을 긋는 가시박의 덩굴이 되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한삼덩굴과 힘겨루기라도 하는지 잎 모양이 흡사한 한해살이 외래종 덩굴식물이다. 만져보면 단면에 각이 져있지만, 줄기는 곱슬곱슬하고 부드러운 털이 밀생한다. 끝이 서너 갈래로 갈라져 잎자루 마디마다 무기 같은 덩굴손이 있다. 전국의 하천부지, 저수지, 농수로 주변 길가나 숲 가장자리를 돌며 약습에서 적습까지 서식한다. 이미 낙동강, 사대강 수계부터 서식지를 넓혀 수도권의 강변까지 점령한 상태다. 무서운 속도가 아닌가. 호박잎처럼 갈라진 덩굴손이 뻗어 나와 땅위를 기어 다니다가 다른 식물을 덮치면서 높은 나무까지 타고 올라간다. 마치 거대한 황무지를 치유하려는 듯 숲 전체를 쓰나미처럼 쓸어버린 형국이다,

소중한 아이들을 가시박의 그늘에 가두려는 것일까. 한강변 매서운 바람 앞에서도 가시박이 거친 덩굴을 놓지 않듯이, 지나친 관념에 사로잡힌 어른이 아이들의 동심에 차별의 굴레를 씌우려 한다. 죽은 잎으로도 다른 생태의 숨통을 옥죄고 있는 가시박처럼 차별 역시 다음 세대로 뻗어갈 씨앗과 거름을 뽑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차별은 보호가 아니다. 아이들의 세계를 말라붙게 하는 명분이 어른들의 내려놓지 못하는 덩굴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아이들의 동심을 질식시키고 얼려버린다는 것을 이제 자각해야하지 않을까.

오후 햇살은 이미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말러의 제3타는 듯한 단검으로의 음률로 전환되고 있다. 관현악에 의한 열광적이고 거친 전주 뒤에, 단조의 미친 듯한 선율로 바뀌어간다. 이 선율은 가슴에는 타는 듯한 단검이 낮에도 밤에도 잠자는 동안에도 나를 괴롭히네라며 폭발적으로 고조된다. 관현악도 함께 응하며 격렬하게 울려 퍼지다가 장조로 바뀐다. 미친 듯이 고조되는 음율 끝에는 쓸쓸함이 배인 아 검은 관에 눕고 싶다로 최후의 클라이막스에 도달한다. 강열하게 타고 올라가던 가시박이 마치 쉬고 싶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무언의 알림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기후일까.

다섯 여인을 쫓아오던 낮달이 저 만치 보낸 오후의 해거름 앞에 발걸음을 정착하고 있다. 해넘이 준비를 하는 행주나루터 물길이 마치 그물막 속에 갇힌 아이들을 비추려는지, 회색 가시박 덤불에다 어둠이 오기 전, 가장 뜨거운 노을빛을 얹고 있다.

 

송정자

한국수필 등단. 지구일보 신춘문예 당선,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미리내수필문학회 회원, 동대문문인협회 감사,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동인, 설총문학상, 동대문문학상, 3회 권대근문학상 수상, 수필집 f홀의 위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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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신춘문예 출신 작가 송정자의 '가시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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